영화 <가버나움>
찬바람이 칼날처럼 불어오는 2018년 겨울, 시기에 맞춰 계절과 닮은 영화가 개봉했다. 열두 살 어린 소년의 치열한 삶의 일대기를 담은 “가버나움”이 바로 그 영화다. 가버나움은 예술영화의 일반적인 파급력과는 남다른 힘을 보여주며 10만명의 관객수를 넘어섰다.
예술영화에 있어서 10만명이라는 관객수는 실로 어마어마한 관객수다.
이 영화를 보면 마치 마음에 칼날같은 바람이 부는듯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어진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보고 ‘고통 포르노’ 혹은 ‘가난 포르노’라며 영화가 안일하게 기존의 신파 코드를 반복하고 있고, 가난과 고통을 보여주는데에 있어서 신중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과 조금 다른 의견을 적어보려 한다.
‘가버나움’이란, 한때 예수의 제 2의 고향이라고 불릴 정도로 축복과 기적이 가득했던 곳이었으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 예수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곳이다. 한마디로 처음 시작과는 달리 그 자체로 지옥이 되어버린 끔찍한 곳이다.
그리고 지옥이란 말이 어울린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영화 속 가버나움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주인공 자인의 삶은 처절하고 치열하고 아프다. 마치 밥을 대신해서 모래알을 씹어 넘기듯, 매 컷이 불편하고 따갑다.
그도 그럴것이, 우선 카메라가 시종일관 클로즈업해서 전면에 내세우는 ‘자인의 표정’은 얼굴 그 자체만으로도 관객에게 뼈아픈 고통을 선사해준다. 몸집이 한없이 작은 열두 살 짜리의 아이의 얼굴에서 마흔 살의 고뇌와 한탄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러하다. 관객들은 어쩌면 아직 본인도 지어보지 못한, 겪어보지 못한 표정을 자인을 통해 봄으로써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끼게 된다.
몇몇 이들은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에 있다고 지적한다. 자인의 표정을 전면에 내세워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감정에 호소하려는 점, 그리고 그 방식이 지나치게 신파적이라는 점이 비판의 화두가 된다.
사실 클로즈업된 자인의 표정과 함께 카메라가 비춰주는 것은
적나라한(다소 자극적인) 자인의 삶 그 자체다.
자인은 자신보다 더 어린 동생이 팔려갈까봐 동생의 초경을 알아채고도 그걸 숨기려 한다. 자신의 늘어진 런닝을 벗어 동생의 속옷에 그것을 덧대는 자인의 능숙한 행동과 표정을 보라. 어느 누가 그 아이를 비추는 앵글에 탄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카메라는 계속 이런 식으로 자인의 처절한 모습을 뒤쫓아간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가난과 고통에 의해 더욱 ‘극적’으로 치닫고, 인물들이 절벽에 점점 더 가깝게 밀려나는 과정 중 가장 고통스러운 지점들을 선택해 카메라를 들이민다.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자인이 일상 속에서 행복해하거나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람의 인생이라면, 그 어떤 인생이든 웃고 행복해하는 순간이 짧게나마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일반적인 시각에 의하면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불행하고 고통스럽다. 관객의 고통이 커지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관객 역시 자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화는 관객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자인이 동생을 구하지 못한 채 집에서 빠져나와 돈을 벌려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은 그저 가시밭길의 전초일 뿐이다. 라힐과 요나스를 만나 잠시 자인이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었던 것처럼, 관객들 역시 잠깐이나마 안심한다.
그러나 그것도 인물의 최종적인 안식이 될 순 없다. 사소한 안정처럼 보이는 라힐과의 만남마저 앞으로 자인이 맞이하게 될 처절한 최후와 스스로에 대한 항변으로 가기 위한 발판이다. 라힐 역시 자인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처절한 약자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이다.
사실 라힐과 요나스, 그리고 자인과의 관계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현실’에 대해서 이해해볼 수 있다. 보통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서로 적대적으로 싸우거나, 동맹을 맺고 감정적으로 공감하여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적대적 관계와 동맹 관계가 불분명하다.
우선 자인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적대적이다. 세상과 자인의 관계는 약자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도 본질적으로 꿰뚫어볼 수 있게 만드는 지점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자인의 부모님 역시 약자다. 그들은 돈과 권력이 없고,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 많아 취약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자인의 부모님은 자인의 적이 된다. ‘부모님’이라는 역할로서 권력 관계의 우위에 서있기 때문에, 자인과 자인의 동생은 또다시 그들에게 갈취당하고 억압당한다.
약자들의 세상에서는 단 한 순간도 누가 내 편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그건 라힐과의 만남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라힐과의 만남이 자인에게 일종의 구원인 것처럼 느껴지며, 관객들은 그들이 연대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라힐이 취약해지는 순간, 바로 그들의 결속 관계는 한번 깨졌던 유리처럼 위태로워진다.
자인은 연락없이 방치된 자신과 요나스를 위해 밤낮없이 생을 갈구하며, 결국 라힐이 그토록 피하려 했던 선택까지 대신 하게 된다. 자인의 이러한 선택에 의해 라힐과 자인은 적대적 관계에 위치하게 된다. 결국 이들 역시 서로에게 확실한 동맹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약자들의 동맹관계는 현실에 따라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봤던 다소 낭만적인 약자들간의 결합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진짜’ 현실에서는 약자들끼리 마음 놓고 결합할 수 없다.
자인의 상황에 있어 구원자가 라힐이었다는 점 역시 지극히 현실적이다. 자인이 제대로 구원받은 적은 없지만, 잠시나마 숨을 쉬게 해줬던 존재들은 자인과 똑같거나 비슷한 약자들 뿐이었다. 라힐과 자인의 여동생인 사하르가 그렇다. 자인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세상 그 자체’이자 이 세상이 가진 일종의 ‘강자 위주의 카르텔’이라는 점이 이러한 인물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강력하고 무거운 카르텔 아래에서, 약자들은 단지 순수한 감정과 감성만으로 결합해야하며, 그 결합은 현실의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기에 약자들은 늘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계속 상기시킨다.
빠져나갈 구멍이 단 하나도 없는 자인의 삶과, 자인의 삶을 더 위태롭게 만든 인물들임에도 쉽게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것 대한 답답함으로 인해 관객들은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린다. 그래서 이러한 ‘궁지에 몰린 심경’으로서, 관객 및 평론가들은 자신이 궁지에 몰린 처지에 대해 ‘이것은 가난 포르노이자 고통 포르노다’라는 항변을 한다.
영화가 주는 적나라하고 매순간 따가운, 그래서 자극적이라고 느껴지는 감정을 자신 안에서 소화시키지 못하고 고통스럽다고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인의 위치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가 맞이한 현실이 자극적으로 연출된 포르노가 아니라 그저 자인이라는 인물이 겪었던 일상들에 대한 내면의 순수한 고백이자 가시화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현실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다.
고통 포르노라는 이유로 이러한 현실적인 장르가 거부당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이 현실을 그저 입 다물고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시작될 때, 가버나움의 자극성은 나름의 존재당위성을 갖는다.
가버나움이 가진 적나라한 자극성에 대해서, 이것이 또 다시 관객들의 시각을 무디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 이러한 생각을 했었다.) 영화의 반복된 탄생은 분명히 관객들의 눈을 무디게 만든다. 처음에는 그저 ‘움직이는 사진’에 경이로워했던 관객들이 이젠 화려한 CG에도 무덤덤하다.
관객들은 자주 봤던 이미지에 익숙해지고 무뎌진다. 그런 점에서 가버나움 속 그들의 현실을 접한 비평가들은 연출자에게 당신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냐고 묻고 싶어진다. 사진이나 영화를 찍는 자로서 늘 갖게 되는 책임감에 대해서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찍은 케빈 카터에 대한 사건이 떠오른다. 케빈 카터는 독수리가 위협하는 소녀를 구해내는 대신 그 잔인한 현실을 찍어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진의 가치를 인정받아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가 소녀를 구하지 않고 그저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만 했다는 비판은 오래도록 끊이질 않았다. 가버나움이 보여준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현실에 대해서도 이러한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왜 그를 구하지 않았나? 무슨 마음으로 이 영화를 찍었나? 감독은 분명히 그들보다 더 사회적으로 우위에 위치한 사람일텐데,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 영화를 찍은 것이 맞나?
여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답변을 대신 내려볼 수 있다. 첫번째로, 영화 속 현실은 케빈 카터의 사진처럼 누군가가 바로 그것을 구출해낼만큼 간단하지 않다. 감독이라는 한 개인이, 영화 속에 등장한 수많은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을까. 이것은 개인이 구할수도, 책임질 수도 없는 중대한 문제다. 사진은 ‘진짜 현실’이지만, 영화는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픽션’이다. 케빈 카터가 구해야했을 인물은 (비록 그것이 아주 단순하고 일시적인 구출이라고 해도)진짜 현실 속에서의 그 소녀 한명이었지만, 나딘 라바키가 구해야했을 인물들은 ‘자인’과 ‘라힐’, ‘요나스’, ‘사하르’ 등의 이름이 지어진 하나의 인물로 대변되는 수많은 다른 약자들이었다. 영화는 픽션이기에 현실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함축적으로 대변한다.
두번째로, 영화가 무책임한 방관이 아닌 변화에 목적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영화가 끝난 후의 자막으로 알 수 있다. 감독은 가버나움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고통받던 영화 속 인물들의 모티브가 된 인물들이 ‘일종의 구원’을 받았음을 자막으로 언급한다. 이 영화가 만들어짐으로써 그들의 현실이 예술로써 시각화되었고, 그 구체적 방식이 어떻게 되었든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그들의 상황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것은 자인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로 대변된 인물들의 현실이 변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자막을 읽은 관객들은, 결코 나딘 라바키 감독이 그저 이 현실을 자극적으로 묘사해 스크린에 걸어둔 채 모든 걸 방관했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들의 ‘변화’는, 그녀가 이 영화를 이끌어간 것이 단지 제작과 상영에 대한 욕망이 아닌, 그 이상의 책임감에 있었다는 걸 느끼게 한다.
고통스러운 자인의 삶의 조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결국 요나스와 라힐, 사하르는 각자의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자신의 목표를 상실한 자인은 광적인 피해자가 되어 살해를 저지르고 만다. 궁지에 몰린 자인이 법정에서 던지는 말들은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다 가시처럼 콕콕 박힌다. 삶에 대한 한탄과 지침이 가득 담긴 열두 살 소년의 거친 욕설과 적나라한 고백은 자인이 걸어온 짧은 삶에 대해 다시 한번 반추하게 한다.
이 영화를 포르노라고 단정짓기에는 영화가 가진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내는 시선들이 너무도 진중하다. 고통을 처음 겪은 자는 고통을 숨기고 싶어하고, 고통을 오랫동안 겪은 자는 고통을 외치고 싶어하고, 고통이 일상이 되어버린 자는 고통이라는 것 자체에 무뎌져 발언권마저 포기한다. 영화는 고통에 무뎌져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수많은 약자들을 변호한다.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한 채, 최대한 감정적이고 격렬하게 호소한다. 이 영화가 대변하는 수많은 약자들이 살아온 인생의 현실을, 그들이 느끼는 그 처절하고 끔찍한 감정을 포르노라는 단어로 거부할 순 없다.
이 영화의 등장이 어쩌면 ‘고통 포르노, 가난 포르노’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것의 시발점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관객들은 자인의 삶을 보고도 무덤덤하게 반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객들이 무뎌지기 이전에 새로운 해결책과 구원의 손길이 현실에 내려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관객들이 방관한채 무뎌지든, 모두의 생각과 시선이 바뀌어 세상이 더 예민하고 불편해지든, 이것은 일종의 기회고 기대다. 약자들이 자신의 터부를 속 시원히 외치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 영화 속 현실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삶의 고통을 호소할 공간이나 상대 조차 결여되어있다.
영화의 마지막, 비로소 자신의 나이처럼 해맑게 웃는 자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웃음은 그가 행복해질 것임을 암시하는 걸까. 혹은 그가 이젠 더 이상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일 것임을 보여주는 걸까. 난 그 무엇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인의 미소는 사막의 오아시스고, 가뭄 속에 내리는 짧은 이슬비다. 자인이 가진 현실은 지독히도 괴롭고 슬프다. 그는 세상과 화해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세상에 도와달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저 조숙한 얼굴로 묵묵히 자신이 살 길을 찾아 돌아다녔을뿐.
그렇게 관객들과 자인 스스로가 기대하고 기도했던 그의 미소는, 세상과의 합일 혹은 화해가 아닌 자신과의 또다른 결합이자 성장이다. 서럽고 타락한 세상 한복판을 이름 없는 유령으로 살아야했던 자인에게, 자신도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는 것. 이제 어디서든 서류를 내밀 수 있다는 것은 개인 스스로에게 작은 구원책이 생겨났다는 걸 의미한다.
자인은 거대한 세상에서 철저히 거부된 자신의 인격과, 이제야 비로소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자신의 인격을 결합시킨다. 그는 아마 멸망 직전처럼 보이는 가버나움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인간이 아닐 거라고, 인간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고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한번 죽어 지옥에 떨어진 죄 지은 영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자인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적어도 스스로가 존재감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 서류와 기록에 발자취를 남기는 인간이 된 것에 대한 기쁨. 이것이 바로 자인의 미소이고, 그가 마지막에서야 열두 살 아이처럼 웃을 수 있었던 이유다. 우리는 가장 원했던 걸 갖게 된 아이의 원초적이고도 행복한 표정을 영영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