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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Sep 22. 2023

시뮬라크르의 세상 속 순수한 '인간'

영화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

마블의 기나긴 한 국면은 <어벤저스: 엔드 게임>으로 끝났고,
그 새로운 시작점은 예상치 못한 '스파이더 맨'의 손에 쥐어진다. 



왜 예상치 못한 인물이냐고 묻는다면(반대로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다음 주자일지도 모른다), 마블과 슈퍼 히어로 영화들이 지지해 왔던 강력하고 다소 마초적이고 이성적 정의론을 지향하는 인물과 스파이더맨이 정반대로 대립되기 때문이다. 

 

스파이더맨 속 '피터 파커'는 아직 어리고, 또 여리고, 다분히 감성적이며, 무지막지한 폭력성을 지향하지 않고(스파이더 맨은 직접적인 폭력을 가한다기보다는 늘 무너져가는 건물을 지키거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이런 캐릭터에서 스파이더맨의 지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항상 망설인다.


어쩌면 이것은 인류가 지향하는 새로운 성향의 슈퍼 히어로일 수도 있다. 폭력성보다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에 망설이지 않는 히어로. 조작된 빌런을 위해 싸워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인간들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 


영화 속 그는 이전의 아이언맨이 도맡았던 역할을 맡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언맨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는 아이언맨과 다르다. 


그가 가진 특별한 감성의 히어로성이 어쩌면 새로운 세대를 시작하는 마블의 표상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엔드 게임> 이후로 마블에 한참 흥미가 떨어지는 관객들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파이더 맨: 파 프롬 홈>은 그러한 관객들의 호기심을 다시 잡아 끈다. 이제 마블이 또 새로운 방향으로 다르게 흘러가겠구나라는 어렴풋한 암시를 피터 파커를 통해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엔드 게임> 이후로 기대치가 다소 낮아질 수 있었던 마블 시리즈에 관하여 다시 이야기해 보자면, 하나의 큰 세대가 끝났다는 점도 있겠지만 '기술의 발전'이라는 점이 오히려 기대감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나 캡틴 마블 등, 지구 외의 영역과 눈에 보이는 액션 외의 능력을 다루는 히어로들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스펙터클이 보기에 매우 좋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익숙지 않은 CG로 점철된 이미지들에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들도 있었다. 그들은 환상적인 빛깔과 함께 별다른 육체적 액션이 없이도 펼쳐지는 액션 장면들을 보고서는, 그다지 몰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 역시 <캡틴 마블>은 여성 서사 덕에 개인적 감정을 가득 담아 그럭저럭 좋게 봤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속에서 등장하는 요소들에는 판타지가 가득한데, 그것들이 마블 속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와는 어쩐지 좀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특히 도르마무의 이미지라든가(사실 도르마무를 처리하는 과정 자체가 코미디스럽긴 했지만) 마법을 써서 장황한 액션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어딘가에 괴리감이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봐왔던 환상적인 코드의 영화들은 대체로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동화적인 느낌이 들면서도 스펙터클이 가득한 느낌이었는데, 마블 속 닥터 스트레인지는 현대적 액션 영화들의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다소 동화적인 CG 이미지를 보여줬기 때문에 어색하게 느껴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찌 됐든, 나는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기술의 발전이 영화에 주는 순기능이 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것이 단순히 상업적으로 관객에게 스펙터클을 제공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영화라는 장르와 역사 자체에 남을만한 근원적인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저 탈피하지 못한 클리셰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새로운 이미지를 구상하지 못해서 그 대안으로 화려한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기술을 사용한다면 조금 더 디테일하고 근원적 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또 이런 식으로 스펙터클을 제공한다면 결국 관객들이 다음 영화에서 기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들이 마구 샘솟았다.



하지만 <스파이더 맨: 파 프롬 홈>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영화 안에서 기술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스파이더맨은 손에 잡히지 않는 범우주적 기운이나 능력을 사용하는 히어로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 속에서는 다른 초월적 히어로들에 비하여 판타지와 같은 기술들이 덜 쓰이지만, 이번 영화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기술적 이미지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술적 이미지들이 단지 스펙터클을 제공하기 위함이 아닌, 영화에서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와 형식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지점에서 새로운 쾌감을 주었다. 그저 하릴없이 눈앞에서 스치듯 소비되는 이미지들이 아니라, 영화관을 나와 집에 도착해서도 떠올릴 수 있는 '스펙터클'을 드디어 발견하게 된 것이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속 키워드는 '시뮬라크르'라고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언맨이 그러했듯, 일상 속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던 히어로들의 경우에는 삶이 철저하게 이중적으로 분리된다. 그것은 히어로의 삶과 인간으로서의 삶이다. 


아이언맨은 학생도 아니었고 금방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고백함으로써 어쩌면 빠르게 그 이중적 딜레마에서 벗어났지만(그럼에도 엔드게임에서 역시 가족들과의 삶과 히어로로서의 삶 사이에서 고민한다), 스파이더 맨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늘 두 가지 인생을 함께 살아와야 했고,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오는 혼란이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거짓말들을 감수해내야 했다.


스파이더맨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그가 스스로 "과연 진실이 무엇일까, 진짜 나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한 번쯤 던지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또한 이중적 삶을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히어로로서의 자아를 명백하게 분리하지 못해서 조금은 엉성해 보이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더더욱 이 캐릭터 자체의 혼란을 보여준다. 그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나는 그저 친절한 이웃이다"라는 말을 한다. 슈퍼 히어로적인 능력을 가졌으나, 인간적인 자아로 살아가고 싶다는 말이다.


이랬던 스파이더 맨이 진정한 자아로 향하는 과정이 바로 기술적 이미지들과 상징들로 완성되어 있었는데, '미스테리오'라는 존재 자체가 스파이더맨에게 던져주는 큰 메시지가 있었다는 것과, 미스테리오로 인해서 스파이더 맨 앞에 펼쳐지는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전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시뮬라크르로서 펼쳐져있다는 것에 특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중적 자아 안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스파이더 맨 앞에 '혼란 덩어리' 그 자체가 등장한 것이다. 미스테리오는 환상적 이미지들을 조작해 사람들에게 그것을 진짜인 척, 빌런인 척 속여 자신을 히어로로 조작하려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마치 우리의 곁에 펼쳐진 현대 사회가 그렇듯 환상적인 가짜의 이미지들을 진짜인 것처럼 속여 스파이더 맨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스파이더 맨은 몇 번이고 미스테리오에게 속아 넘어가 낯선 곳에 내던져지고, 버거운 고난과 시련을 견뎌낸다. 이 시퀀스들을 통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잔인한 현실 속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피터 파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애초에 그가 미스테리오에게 '이디스'를 넘겨준 것 역시 스파이더 맨의 순수한 인간성 덕분이었다. 그는 여느 인간들이 그렇듯 눈에 보이는 것을 자연스레 믿었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게 이디스를 넘겨줬다. 그것이 아이언맨이 남긴 중요한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디스를 쓴 미스테리오의 모습에(아이언맨과 굉장히 닮았다) 설득당하고 마음이 동하여 그를 그만 믿게 된 것이다. 


피터 파커가 인간적으로 그 존재를 믿은 것에 대해선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그 애처로운 믿음으로 인해 결국 큰 위험 상황에 빠지게 됐다. 피터 파커, 스파이더맨은 그 위험에서 세상을 구출하기 위해 선택의 기로에 던져진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인간이 될 것인가, 히어로가 될 것인가. 과연 어느 것이 피터 파커이며, 어느 것이 '진짜'인가.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스파이더맨의 길은 매우 험난하다. 그는 강한 현기증을 느낄 만큼 혼란스러운 진짜 같은 가짜의 이미지 속에서 몇 번이고 조롱당한다.


스파이더맨이 결국 아이언맨처럼 다시 되살아나 미스테리오를 처치했다는 전형적인 플롯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스파이더 맨 파 프롬 홈에서 보여준 이 다양한 CG 이미지들과 상징들은 가치가 분명하다. 미스테리오는 죽을 때, "사람들에겐 믿을 것이 필요하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이 말은 어쩌면 영화관을 보는 관객들에게도 통하는 말이다. 

사실 미스테리오라는 존재와 스파이더 맨이 겪는 빌런이라는 환상 자체가 관객들에게 주는 메시지들 역시 인상적이다. 우리는 여태 아무런 질문도 없이 스크린에 히어로들이 등장하면 그들을 믿었고, 빌런들이 '정말로 그냥 나쁜 인물이다'라는 전제 하에 영화를 관람해 왔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액션들은 가짜지만 진짜처럼 리얼했다. 관객들은 그들을 '믿었다'. 


그러나 이 영화적인 환상이 주는 것 속에서 과연 '진짜'는 어디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미스테리오를 통해 스파이더맨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전달된다. 왜냐하면 시놉시스를 읽지 못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의 초반부까지만 하더라도(이디스를 넘겨주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스테리오를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인가?'라고 생각하며 속아 넘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겐 믿을 것이 필요하다'라는 미스테리오의 대사는 굉장히 상징적이다.


영화를 보고 근원적 질문과 마주친 관객들은 선택을 할 것이다. 영화처럼 시뮬라크르로서 허황된 이미지에 속아 넘어갈 것인가, 혹은 그와 다른 '인간'으로서 그 이미지들을 한번쯤 의심해 볼 것인가.

스파이더맨은 메이 숙모와 해피 앞에서 역시 의미심장한 대사를 던진다. 그동안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와야 했기 때문에, 이제 거짓이라면 넌덜머리가 난다고(이 대사는 미스테리오와의 플롯으로서 완성된다). 관객들 역시, 스크린 앞에서 의문에 잠긴다. 


무엇이 진짜일까? 영화라는 환상이 주는 가짜 속에서 대체 무엇이 의미가 있는 것이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스파이더맨은 어쩌면 상업성이 강한 히어로물을 목표로 하고 있으면서도, 관객들 스스로가 그 속에서 자멸되지 않도록 근원적 질문을 남기게 만든다. 당신이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들을 믿을 수 있냐,라는 질문 말이다.


게다가 마지막, 엔딩 시퀀스에서 별 다른 위기 상황도 없는데 여자친구를 안고서 도심을 날아다니는 스파이더 맨의 모습을 보면, 이것이 '진짜인가?'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진짜에 대한 의문은 여기에서 한 번 더 떠오른다. 위기 상황이 아닌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날아다니는 이 히어로를 당신은 믿을 수 있는가? 혼란은 꺼지지 않고 지속된다.

<스파이더 맨: 파 프롬 홈> 속 스파이더맨에서는 현대 사회 속 시뮬라크르에 잠식된 인간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관객들은 수많은 가짜 속에 살아가면서도 그것들을 진짜라고 믿는다. 그건 인터넷 속의 무수한 이미지들과 정보들도 그렇고, 우리가 손쉽게 소비하는 영화 역시 그렇다. 단순히 가짜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돈을 주고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고 스파이더맨을 좋아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짜는 재미가 없으니 말이다(어른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연결된다).


스파이더 맨의 혼란스러운 모습은, 시뮬라크르라는 인공적 세계(인간이 만들었지만 결코 인간이 적응하기 쉽지 않은)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완성한 기술적 이미지들과 상징들과 플롯이 주는 메시지들은 단순하고 쉽고 피상적인 무언가로 치부하며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진짜라고 말할 수 없는 가짜', '가짜라고 말할 수 없는 진짜' 속에서 매일매일이 다시 태어나는 이 현대성을 가장 잘 수용하고 적용시킨 히어로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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