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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Sep 16. 2023

고통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영화 <세 가지 색 : 블루>

불행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다가온다.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에 들이닥친 사건은
완벽한 균형에 가까웠던 삶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차 사고가 났던 날의 순간을 줄리는 기억한다. 남편 파트리스는 시시한 농담을 하며 줄리를 웃기고 있었다. 남편의 농담에 웃었고, 차에는 귀여운 딸 안나도 함께 했다. 


그날의 사고로 파트리스와 안나는 줄리만을 세상에 남겨두고 죽는다. 살아남은 그녀가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은 살아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못 견딜 만큼 끔찍한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남은 삶이 막막하게 느껴짐은 다름이 없다.


불행은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무기력, 우울, 자살 충동, 끊임없는 고독감?


역설적이게 불행은 그녀에게 자유를 가져다준다. 


시대의 중요한 작곡가로 불린 파트리스의 아내였던 줄리는 언제나 아내로서, 또 엄마로서 살아간다. 그 역할은 안전하고 행복하지만 반대로 옭아매기도 한다. 파트리스와 안나가 죽은 직후 아직 그 역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줄리는 마치 살아남은 자신을 부정하듯이,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아닌 자신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을 버리고 숨어버린다.


그러나 숨어버린 줄리를 자꾸만 두드려 깨우는 일들이 생긴다. 파트리스의 곁에서 자신을 사랑해 왔던 올리비에의 마음, 자신 몰래 다른 여자와 연인 관계를 유지했던 파트리스. 줄리는 처음에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지만, 점점 그 사실의 한복판으로 파고들어 가게 된다. 


파트리스의 미완성 곡을 완성하겠다는 올리비에에게 찾아가던 순간, 파트리스의 정부에게 찾아가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줄리는 모든 것에서 등을 돌릴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파트리스의 저명한 모든 곡은
남편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줄리의 몫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줄리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던 건 온전히 남편을 위해서였다. 남편의 명성을 위해서,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줄리는 숨어버린 것이다. 그런 줄리의 모습이 담긴 하나의 장면이 있다. 


병원에 입원한 줄리에게 찾아온 기자가 파트리스의 곡 중 줄리가 작곡한 곡이 있지 않냐고 묻자, 줄리는 대답을 하지 않고 기자를 피한다. 이것이 줄리가 파트리스와의 삶을 지속해 오면서 선택한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남는다.
줄리는 파트리스의 정부인 샌드린에게 혐오감을 느꼈을까?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꼈을까?
혹시 줄리 역시 올리비에를 사랑해 왔던 건 아닐까?
남편의 죽음이 그녀를 해방시킨 걸까?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뚜렷하게 대답할 수 없다. 줄리 역시 이 모든 질문에 분명히 대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방식이 남편과 그녀 자신을 배려하는 방식이었다는 건 알 수 있다. 남편의 아이를 가진 샌드린에게 남편의 집을 넘겨주고, 오래된 마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올리비에에게 다가서는 줄리의 의지는 어떤 역할 속에 갇힌 사람이 아닌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서의 의지다.


삶을 살다가 갑자기 찾아오는 불행이나 끔찍한 순간들에
대비하는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순간을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은 가혹하다. 사는 동안 내게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온다고 해도 가장 덜 끔찍한 방식으로 오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불행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변해야만 한다. 고독해져야만 하고, 아파야만 하고, 예민해져야만 한다. 그 고통은 한 사람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세상에서 가장 아프지만, 남은 삶을 그나마 살아가게 하는 산소호흡기 같은 자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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