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카 Aug 03. 2020

스위스_ 그린델발트 & 주변 걷기 2

: First- Bachalpsee-Bort-Grindelwald

앨리스 할머니네 집에 체크인을 할 때, 그린델발트 주변 하이킹 지도를 받았는데 꽤나 유용했다. 그린델발트에 처음 도착해서 짐을 풀어놓고 나니 오후 2시 정도 되었다. 날씨는 매우 화창했는데, 일기예보 상으로 다음날과 그다음 날에는 비가 예상되고 있었다. 

하이킹은 특히 파노라마 뷰 감상이 목적인 경우는 날씨가 생명이다. 예를 들어, 나는 10년 전에 체르마트에  마터호른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갔던 3일 내내 흐리고 비가 와서 마터호른은 구경도 못했다. 나는 스위스 사람들처럼 2주씩 여기 있지 못하니 전략을 잘 짜야했다.


지도를 보고 고민하다가, 해가 아직도 기니 곤돌라 케이블카를 타고 First (피르스트)로 올라가서 유명하다는 Bachalpsee 호수를 보고 그린델발트까지 걸어서 내려오는 걸로 결정하고,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곤돌라는 스위스 철도 할인권 50% 할인을 받아서 16프랑. 이미 오후가 되어서 올라가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곤돌라 하나에 나 혼자 타고 올라갔다. 정상인 피르스트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린 듯하다. 이미 벌써 3시이고, 많은 사람들이 벌써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고 있어서 마음이 급해졌다.


스위스 하이킹/ 트레킹 레일에는 소요시간이 항상 명시되어 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하이킹 같은 경우는 내가 걷는 속도와 거의 맞는 편이었지만, 트레킹은 알 수 없었다. 예전에 덩치 좋은 서양 남자들과 함께 에티오피아에서 트레킹을 한 적 있는데, 그네들 따라가다가 헬리콥터로 긴급 구조당할 뻔한 기억이 있어서, 트레킹 소요시간이 나에게도 적용이 되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일단 예쁘다는 Bachalpsee 호수를 향해 출발. 2000미터가 넘는 고산이긴 하지만, 길이 워낙 잘 나 있어서 유모차를 끌거나, 아기를 업고 오는 가족들도 많았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긴 했지만, 풍경이 워낙 좋아서 힘들지 않게 걸어갔다. 그린델발트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져서 아름다웠다. 급한 마음에 쭉쭉 올라가다 보니, 40분 만에 호수에 도착했다. (이정표에는 50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내가 마음이 급한 탓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 듯.)


호수는 예쁘긴 했지만, 감탄이 나올만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호수에 비치는 설산의 모습이 아름답다는데 내가 갔을 때는 그런 풍경은 없었다. 여기서 이어지는 트레킹 레일이 또 무궁무진했는데, 오후라서 더 멀리 가기에는 부담이 많았다. 만약에 혹시라도 체력이 떨어지거나 무슨 사고가 생기면 버스든 곤돌라든 타고 돌아가야 하는데, 대체로 마지막 차 시간은 5시에서 5시 반 사이여서 말이다.  무슬리 바를 하나 씹어 먹고, Bort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이정표를 따라가기는 했는데, 내 앞으로도, 내 뒤로도 아무도 이 길을 가는 사람이 없었다. 고산 한가운데 설산과 푸른 하늘, 그리고 나 혼자 오롯이 남겨진 느낌이었다. 나는 타고난 길치이기 때문에,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트레일 표시가 나무나 바위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이 길은 여름에만 등산할 수 있다고 한다. 나무도 거의 없고, 7월 초에 활짝 핀 야생화와 풀들만 있었다. 나를 감동시킨 건, 이름 모를 수많은 야생화였다. 알고 보니 내가 걸었던 트레일의 이름 역시 '알펜 로즈 트레일'이었다. 


잘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트레일 표시가 없고, 길이 진흙과 구덩이가 많아졌다. 또 길을 잃었나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마침 아주 비싸 보이는 산악자전거를 타고 이쪽으로 올라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인사를 하고, 내가 이게 Bort로 가는 길이 맞냐고 하니, 나에게 길을 잘 못 들었다며, 위로 올라가서 곤돌라를 타란다. 그래서 나는 Bort를 거쳐서 Grindelwald로 걸어가고 싶다고 하니, 그러면 아래쪽에 따로 트레킹 트레일이 있다고, 여기는 바이크 트레일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독일어권 스위스에서 온 중년의 바이커들이었는데, 그린델발트에서 산악자전거를 타고 올라왔단다. 정말 감사하다며, 혼자 길을 걷는데 아무도 없어서 엄청 무서웠다고 말하자, ' 우리가 있잖아. 네가 내려가는 걸 우리가 지켜볼게.'라며 너무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 줬다. 그리고 실제로도 내가 바이크 트레일을 벗어나 트레킹 트레일로 무사히 접어들 때까지, 그들은 길을 멈추고 나를 지켜봐 주었다. 고마운 사람들!!

그래서 계속 전진. 중간 지점이라 할 수 있는 Waldspiez에 도착했다. 이제야 집도, 식당도 보이고, 노란 그린델발트 버스가 올라오는 것도 보였다. 어디서 인지는 모르지만 걸어 내려오는 등산객들도 여럿 보였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Bachalpsee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50분 정도 걸렸다. 결론적으로 트레킹 트레일의 시간도 내 속도와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Waldspiez에서 Bort까지는 가파른 산길을 빨리 내려가는 방법과 완만한 길을 돌아 내려가는 방법이 있는데, 풍경이 산길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가파른 길을 택했다. 그런데 정말!! 길이 자비 없이 가팔라서, 등산 스틱이 없는 나는 거의 엉금엉금 기다시피 했다. 역시나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설산을 다른 측면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이 아름다운 풍경을 독차지하는 듯해서, 좋았다. 그렇게 50분 정도 또 걸어서 Bort에 도착했다. Bort는 First까지 가는 곤돌라의 중간 역이어서, 여기서 Grindelwald까지 곤돌라를 탈 수도 있다. 풍경은 여기는 이미 1500미터까지 내려와서, 아름답기는 했지만, 아주 압도적이지는 않았고 사람들이 많았다. 

2시간 40분 정도를 거의 내려오는 등산을 했고 시간이 5시 반이 넘어서, 여기서 곤돌라를 탈 것인가 아니면 나머지 1시간을 걸어서 내려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아직 기력이 남아있고, 날씨가 너무 좋고, 또 내일 날씨가 좋지 않다고 하니 걸을 수 있을 때 최대한 걸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쭉 Grindelwald까지 내려갔다. 특별한 풍경은 없지만,  쉽게 쉽게 내려갈 수 있는 좋은 길이었다. 


오늘의 3시간 40분의 걷기를 마무리했다. 스위스에 와서 산을 여기저기 다녀 보긴 했는데, 등산을 하려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장비를 잘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리막에서 등산 스틱이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린델발트 시내에서 등산용품점에 들러서 괜히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등산 장비가 없어도 멋진 풍경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 곳은 무궁무진했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베란다에서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내일 어디 갈까 살펴보고 있자니 옆방의 독일 아저씨가 나오셨다. 역시나 산악자전거를 타시는 분인데, 1주일째 여기서 자전거를 타고 계시단다. 베란다에서  자전거를 무슨 아기 다루듯이 소중하게 닦고 만지고 하시는 게 재미있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여기에 글을 쓰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