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_ 그린델발트 & 주변 걷기 3
Pfingstegg-Milchbach-Wetterhorn
스위스 메테오의 날씨를 수시로 체크했다. 지난주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가 계속되더니 그린델발트는 오늘 오후부터 내일 오후까지 내내 비가 내린다. 스위스 메테오의 날씨는 우리나라 기상청과는 달리(!) 정확한 편이어서,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혼자인 나는 높은 산의 등산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더구나 날씨가 별로이면 풍경 또한 별로이다.
쓸데없는 걱정 탓인지 아침 6시에 깨버렸다. 오후 1시부터 비가 예상된단다. 가야지 생각했던 맨리헨((Manlichen)으로 가는 케이블카는 9시에야 문을 여는데 거기서 벵엔(Wengen)까지 갈 생각이면 오늘은 힘들 것 같고, 클라인 샤이덱(Kleine Sheidegg)으로 가서 아이거 트레일을 타 볼까 하다가 그냥 내키지가 않았다. 또 지도를 보고 한참 고민 끝에 그린델발트에 있는 동안 갈 수 있는 곳을 가보자 해서, 비교적 낮은 언덕인 핑슈텍(Pfingstegg)을 가보기로 결정했다.
모든 준비를 다 하고 나와도 7시 30분. 핑슈텍으로 가는 5분 걸리는 케이블카가 있다는데 역시나 9시부터 연다고 한다. 지도를 보니 그린델발트에서 핑슈텍을 걸어가면 1시간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럼 걸어가지 뭐. 씩씩하게 이정표 따라서 걸어가 본다. 새벽의 그린델발트는 부지런한 등산객들로 벌써 분주했다. 가족단위 등산객들이 꽤나 많은데 꼬마들도 자기 배낭을 메고, 등산 스틱까지 장착한 채 곧잘 걷는 게 신기하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스위스 사람들은 모두, 주말마다 여름엔 등산과 캠핑, 수영을 하고 겨울에는 스키나 스노우워크를 하면서 굉장히 건전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는 듯하다.
핑슈텍은 어제 갔던 피르스트와는 반대방향에 있어서 피르스트 쪽을 볼 수 있다. 역시나 표지판은 길치인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중간중간에 잘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말 얄짤없는 오르막이었다. 1시간 오르는데 중간에 숨을 몇 번이나 골랐는지 모른다. 또 처음부터 중반부까지는 계속 숲길이 어서 풍경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인기있는 트레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역시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시간을 헥헥대며 핑슈텍에 도착했다. 역시나 풍경은 멋있었고, 정상에 있는 카페도 케이블카도 문을 열기 전이어서 거기에는 오롯이 나 혼자 밖에 없었다. 나무 벤치에 누워서 책을 몇 페이지 읽었다. 아침에 일찍 올라 오길 잘 했구나 나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산세는 피르스트 쪽이 더 웅장하고 멋있었지만, 이 쪽은 고즈넉한 맛이 있었다. 누워 있다 보니 케이블카가 천천히 올라오면서, 몇몇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주로 빙하로 올라가는 사람들인 듯했다. 나도 빙하 근처까지 가 볼까 생각했지만, 장비를 잘 안 갖췄다는 핑계로 아주 쉽지만, 파노라마 뷰가 좋다는 Milchbach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이후로는 아주 평탄하지만 빙하와 계곡, 설산을 골고루 볼 수 있는 길이 펼쳐졌다.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몇몇 마주쳤지만 여전히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그린델발트를 짧은 기간 동안 오는 사람이라면 별 볼 게 없다고 할 풍경이지만, 나름 아기자기해서 나에게는 좋았다. 1시간 30분 정도 걸으니 Milchbach를 거쳐 Wetterhorn에 도착했다. 트레킹보다는 하이킹에 가까운 길이었다. Wetterhorn에서 GR.Shneidegg 까지 올라가는 길이 보여서 잠깐 흔들렸지만, 내 한계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싶어서 거기서 1시간 정도 그린델발트로 걸어서 돌아왔다.
총 3시간 30분 정도 걸었고, 아침 일찍 시작해서 중간에 여기저기서 누워서 쉬고 계곡물에 발 담그고 해도 12시도 되지 않았다. 날씨는 여전히 햇빛이 쨍쨍 나서, 괜히 내가 겁먹고 더 걸을 수 있는데 포기했나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시내 슈퍼에서 장을 보고,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후 1시 정도 되니 비가 거짓말처럼 쏟아졌다.
오후는 내리는 비를 보면서 책을 읽고, 유유자적했다. 한국인이 남겨 놓고 간 정이현의 소설 '사랑의 기초-연인들'을 읽었다. 아주 평범한 커플이 어떻게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또 갈등을 겪고 실망하고, 결국은 헤어지는지 담담하지만 공감할 수 있게 풀어낸 소설이었다. 확실히 소설은 또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잊고 지냈던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