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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시인, 이중섭

김탁환, 참 좋았더라

by 파란하늘

서피랑에 오르면 배수지를 보면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에 걸려 있는 화백의 원본 작품 한 점이 바로 저기 배수지가 공원이던 시절에 남망산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라고, 이중섭의 그 유명한 소 그림은 바로 통영에서 그린 그림이라고, 제주도 그 좁은 방에서 아버지로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면, 화가로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여기 통영이었을 것이라고.


[참 좋았더라]는‘이중섭의 화양연화’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전쟁의 포화가 지나고 너도나도 어렵던 시절에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통영에서의 시간이 그에겐 화가로서의 화양연화였을 것이다. 소설은 이중섭이 통영에 머물던 그 시기만 담았다. 통영을 떠난 후 급격히 고꾸라진 그의 삶 직전,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찬란했던 시기. 그래서 그랬을까,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예술혼에만 마음이 쏠렸다.

통영에 이사와 처음 한 일은 그림을 배우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이사 온 동네 친구의 권유로 처음 그림을 그리러 갔을 땐 막막했다. 학교 때 배운 수채화도 아니고 유화였다. 물감도 붓도 낯선 유화 도구와 캔버스 앞에서 어찌해야 할 바 몰랐으나, 곧 빠져들었다. 수채화의 경우 잘못 칠하면 그림을 버리고 새로 그려야 하지만, 유화는 말렸다가 긁어내고 다시 칠하면 되었다. 수채화처럼 매끈하게 칠하지 않아도 되었다. 덕지덕지 물감이 덧입혀질수록 그림의 맛이 더해졌다. 그렇게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그림의 재미에 푹 빠져 5년을 살았다.

중간중간 선생님이 데생을 권했으나 화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취미로서의 그림이었다. 색칠하는 재미에, 모른 척했다. 그러다 한계에 부딪혔다. 미술의 기초인 데생부터 시작한 걸음이 아니었고, 빈 캔버스를 앞에 놓고 뭘 그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이게 맞나 싶었다. 유화 또한 예술이다. 무릇 예술혼이란 그리고 싶은 것들이 뿜어져 나와 캔버스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무엇이든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것이라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의 갈림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때 데생을 배우고 기초부터 다시 닦았다면 ‘화가’라는 직업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그 당시 내겐 ‘예술혼’이 없다고 결론짓고 붓을 꺾었다.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이중섭 화백처럼 그런 발걸음을 보여준 이가 없다. 시인은 글 짓는 화가요 화가는 그림 그리는 시인이라며 시를 줄줄 외워 읊던 그였다. 이중섭은 풍경화 한 점을 그리기 위해 통영 사람보다 더 많이 통영 곳곳을 누볐다. 그의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니다. 그만의 바다를 그리기 위해 남망산에 오르고 동피랑에 오르고 서피랑에 올랐다. 그의 고향 원산에 가 닿는 물길을 그리던 그에게 제자 남도일이 자신의 그림에서 부족한 것이 묻자 이렇게 답했다.


'화가에겐 눈과 정신이 중요한데, 눈은 자연을 보는 것이고, 정신은 논리를 동반한 감각이다. 보이는 대로만 그리면 사진과 같다. 해석을 해야 한다.'


나는 눈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보이는 대로 그리기에 급급했으니 나는 화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소설 속에만 있는 인물이지만, 남대일은 훌륭한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전에 전혁림 화백님이 도자기 그릇으로 천 개의 만다라를 만드실 때 여쭈었다.

“이 점과 선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나의 우문에 화백님은 웃으며 답하셨다. “그럼!”


그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하지는 않으셨으나, 그 의미가 누구나 다 아는,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화백님만의 의미가 담긴 천 개의 만다라는 같은 모양 하나 없이 다 다른 모습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중섭, 그가 남긴 작품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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