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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일이 아니라 나의 일

-<딸에 대하여>. 김혜진

by 파란하늘

주인공인 ‘나’는 요양보호사다. 고상하고 우아한 삶을 살고 싶지만 사별 후 처지가 어렵다. 자신이 돌보던 ‘젠’ 평생 독신으로 훌륭한 일을 하던 이다. 요양원에 입원할 때만 해도 여러 사람이 와서 관심을 보이고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결혼도 마다하고 남을 돕는 일에만 매진하다 돌봐줄 이 하나 없이 늙어버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런 그녀를 존경했다. 치매 증상이 심해지자 그녀에 대한 관심도 후원도 끊겼다. 그러자 요양원에서는 적자를 핑계로 그녀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 ‘나’는 요양원의 행태에 반발하며 그녀를 지키지만 딸아이의 문제로 결근한 날 일은 벌어졌고, 항의하던 그녀는 해고되었다.

주인공의 딸은 대학 시간강사다. 그녀에겐 7년을 사귄 ‘그 아이’가 있다. 엄마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존재다. 동성애 문제가 불거진 다른 강사가 계약 해지되자 그녀도 커밍아웃하며 그들을 돕는 시위를 하느라 둘이 살던 집의 보증금을 까먹고 엄마 집으로 그 아이와 함께 들어온다. 딸의 시위가 길어지며 그 아이는 생활비를 대고 있음에도 엄마는 그 아이의 존재가 한없이 불편하다. 모진 박대에도 그 아이는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킨다. 결국 살림 잘하고 차분하며 잔정이 많은 그 아이에게 엄마도 마음을 내어주게 된다.


‘나’는 해고된 이후 젠을 찾아내 집으로 데리고 온다. 혈혈단신인 그녀가 후원이 끊긴 이후 요양원에서 홀대를 당하는 모습이 꼭 자신 같았던 ‘나’다. 그렇게 혼자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던 것이다.

남의 일에 시간 낭비한다며 딸아이에게 모진 말을 퍼붓던 그녀는 남인 젠을 돌보며 세상 모든 일이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렇게 세 사람은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서로를 보듬으며 남은 생을 살 것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 왔다. 좋은 자식 좋은 형제,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이웃, 그리고 오래전에 좋은 선생님.

정말 힘들었겠구나.

나는 공감하는 사람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나는 응원하는 사람

다 이해한다. 이해하고말고.

나는 헤아리는 사람.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사람.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깊이 빠지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입은 옷을, 내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사람.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사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걸까. 그러나 지금 딸애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며칠 동안 딸과 나 사이에는 캄캄한 침묵이 흐른다. -p69


*지금은 저래도 저분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생각을 좀 해봐. 처음 여기 올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와서 잘 보살펴 달라는 인사를 하고, 정신이 말짱할 때는 자기한테도 얼마나 좋은 말을 많이 했어. 세상에, 그런데도 이제 와서 쓰레기통에 처넣듯이 보내 버리겠다니. 우리라도 뭐 다를 거 같아? 우린 영원히 저런 침대에 안 누워도 될 것 같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정신 좀 차려. 정신을 좀 차리라고.

그 말을 하는 동안 나는 젠이 아니라 나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니라 딸애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건 세상의 일이 아니고 바로 내 일이다.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온 나의 일이다. 이런 말이 내 안의 어딘가에 있었다는 게 놀랍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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