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 수집가 Jan 26. 2021

제로 웨이스터의 떨리는 첫 장보기

신입 제로웨이스터의 일기장




드디어 오늘, 초보 제로 웨이스터의 장보기 첫날이었다. 우선 사야 할 목록을 세세하게 적어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지갑 하나만 들고 가볍게 나섰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일회용 비닐 없이, 플라스틱 포장재 없이 장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사야 하는지, 그 무엇을 담기 위해 어떤 걸 챙겨가야 할지 계획을 잘 세워야 했다.



제로 웨이스트를 처음 실천하는 날이기 때문에, 너무 거창하거나 어려우면 당장에라도 포기하고 싶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늘의 장보기 목록은 < 두부, 과일, 고구마, 상추, 마늘, 커피 > 로 간단하게 적어보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장바구니 안에 얼마 전 만들었던 프로듀스 백과 반찬통, 텀블러를 챙겼다. 반찬통에는 두부를, 텀블러에는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와야지! 처음으로 일회용 비닐이 아닌, 프로듀스 백에 식재료가 담길 것을 생각하니 입꼬리가 마구 올라갔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감사하게도 전통시장이 있다. 어쩌면 나는 '시장' 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제로 웨이스트를 단숨에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포장재 없이 구입하기에는 아무래도 대형마트보다 시장이 더 수월할 테니까.



시장까지 걸어서 10분 - 세상에, 장 보러 가는 길이 이렇게 떨리고 설레는 일인가 싶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여기에 담아주세요' 라고만 말하면 될까?' 머릿속으로 수없이 연습을 하며 도착한 시장에는 식재료만 봐도 봄이 온 것 같았다. 우선 제일 처음으로는 금귤을 샀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요거트랑 갈아먹으면 환상적인 맛이다. 벌써 금귤의 계절이라니 - 가격도 무려 2000원이다. 역시 시장이 싸다 싸. 반가운 마음에 프로듀스 백을 드리며 말했다. 나름 역사적인 첫 순간이었다.





"사장님 금귤 한 바구니만 여기에 담아주세요!"



프로듀스 백 첫 사용인지라 괜히 웃음도 났다. 하지만 사장님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웃음기 가득한 나와는 다르게, 대조되는 표정으로 말이다.



"여기에 담아 달라고요?... 비닐에 아예 안 담고요? 그냥 여기에 바로 담아요??"



심지어 마지막에는 재차 확인까지 하셨다. "진짜 담아요?"



네. 진짜 담으라구요.






그리고는 시장 끝자락에 있는 마트에 갔다. 여기는 대형마트와는 다르게 거의 모든 식재료를 원하는 만큼 담아서 구매할 수 있다. 그래서 자주 이용하는 곳인데 그만큼 일회용 비닐 사용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만큼은 꼭! 버려지는 일회용 쓰레기가 없는 건강한 소비를 실천하고 싶었다.





특히 여기는 고구마 맛집이다. 껍질에 꿀이 흘러있을 정도로 진짜 맛있는 고구마를 판다. 가자마자 제일 큰 백에 고구마를 담고, 냉동실 속 고기와 같이 먹을 생각에 상추도 주섬주섬 담았다. 묵직해진 2개의 프로듀스 백을 들고 저울로 갔는데 순간 아주머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머!! 여기에 담아오시면 안 돼요! 저기 비닐 있어요!"



"아... 그냥 여기에 담으면 안 될까요?"



"저희는 비닐에 담는 게 원칙이에요!"



"왜요?"



"비닐 무게에 맞춰져 있어서 여기에 담으면 무게가 더 나간다고요!"



"몇백 원 더 나와도 괜찮아요. 그냥 여기에 해주세요" 난생처음 겪은 실랑이 끝에서 승리했으나 뒤통수에 들려오는 한마디가 왠지 모르게 언짢았다.



"아니 왜 비닐 냅두고 엉뚱한데 담는데? 참나"



뒤돌아서 한마디 해줄까 싶었다. "비닐은 만들어지는데 5초! 분해되는데 500년! 우리는 지금 죄를 짓는 거예요!" 라고 말이다. 지금도 이 말을 못 하고 온 게 후회스럽다. 평소 엄청 친절하고 정겨운 분들 이어서 좋아하는 마트였는데, 그래서 더 서운함이 큰 걸까? 환경을 지키고자 했던 행동이 이렇게 싫은 소리 들을 일인가 싶다 -






마지막으로는 두부를 사러 갔다. 평소라면 마트에서 파는 두부를 샀겠지만, 두부 포장에서 나오는 플라스틱과 비닐 껍질이 생각나 시장의 손두부 집을 들렀다. 사장님은 할머니셨는데 조심스레 내민 반찬통을 받으시고는 다행히? 기분 좋게 받아주셨다.



그러나,





두부를 담으려니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되는 비닐을 생각 못 했다. 자연스레 비닐을 사용해 두부를 담으시는 모습에 '아차... 저 비닐을 생각 못 했네' 싶었다. 맨손으로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른 제로 웨이스터 분들은 어떻게 구매하실까 궁금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비닐 하나가 생겨버렸지만 대신 플라스틱 하나를 줄였다는 것으로 위안 삼으려 한다.








집에 와서 정리해보니 오늘의 장 보기에서 나온 비닐은 두 장이었다. 마늘은 포장된 것뿐이어서 어쩔 수 없이 구매하고야 말았다. 통마늘을 사야 하나 싶었지만 처음부터 무리했다가는 쉽게 지칠 것 같았다. 롱런하기 위해서는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실천해가기로!



집에 오는 길, 늘 가던 카페에서 헤이즐넛 라떼를 테이크아웃 해왔다. 항상 테이크아웃 컵에 받아왔는데 처음으로 텀블러를 내밀었다. 얼음도 더 천천히 녹아서 오래도록 맛있었다.



돌이켜보니 생각보다 순탄치 못한 장 보기였다. 기대와는 다르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고, 또 기대와는 다르게 뿌듯했다. 고작 6가지 식품을 사 오는데 오만가지 기분이 오갔다. 생각보다 많은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단 하루 만에 경험했다. 오늘 나를 만난 분들은 저 여자 참 유난스럽다고 생각했을 거다. 내가 생각해도 유난스러운 장 보기였지만 앞으로도 계속 유난스러울 생각이다. 이미 예전에 사다 놓은 일회용 수세미와 종이컵, 나무젓가락들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말이다.



여태껏 '내가 사는 지구' 라고 생각해왔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사는 지구가 아닌 '우리가 사는 지구' 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가 조금 더 오래 건강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언젠가 태어날 나의 아기가 지구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



2020. 3. 9. Mon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부터 내 삶은 제로 웨이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