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딸이 동거를 한다면...?
그래서... 지금... 동거를 하겠다는 그 말이냐?
한참만에 아빠가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목소리를 높이던 아빠는 다시 말을 삼켰다. 파르르 떨리는 얼굴 근육에서 당혹스러움과 화를 어떻게든 다스리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첫 딸인 나는 아빠와 각별했다. 좋아했던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술을 사줬던 사람도 아빠였고, 작가가 되겠다고 모두의 반댓속에서 회사를 때려칠 때도 누구보다 응원 해줬던 사람도 아빠였다. 일요일이면 아빠와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는 것이 일상이었고, 큰 행복이었다.
환갑이 훌쩍 넘은 아빠는 그 시대의 부모님들처럼 보수적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진보적이었다. 아니, 적어도 내 이야기에 귀를 귀울이며 이해하려 노력했다. 엄마보다 아빠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낸 이유기도 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아빠는 더 이상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중에 아빠 친구분께 들은 얘기로는 아빠는 그날 소주를 들이부었다고 했다.
예상대로 엄마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현모양처이다. 그 시대 대부분의 어머니 상처럼 자신보다는 가정을 위하고, 본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며 살아왔다. 세상의 기준과 남의 시선을 중요시하는 엄마는 번번히 나와 부딫쳤다. 엄마는 남들 사는데로 살지 않는 나를 이해할 수 없어 했으며, 나는 엄마에게 이해가 아닌 인정을 원했다.
이삿날이 다가올 때까지 부모님은 나와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다. 진솔하게 대화를 하고 싶다고 카드를 남겼지만, 이삿날이 있는 주에는 아예 여행을 가셨다. 동거를 하겠다고 말을 꺼낸 뒤 단 한 번의 대화도 못한 채 그렇게 집을 나왔다. 들어볼 가치도 없었던 것일까. 화가 나서일까. 둘 다 겠지. 여행에서 돌아온 엄마는 내 방을 보고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고 남동생에게 전해들었다. 회피형인 엄마 뿐만 아니라 문제를 직면하는 정면돌파형인 아빠마저 내 입장의 반론의 기회조차 주지 않음에 나 역시 상처받았다.
왜 동거가 하고 싶어?
이유는 단순하다. 함께 있고 싶으니까. 함께 있으면 행복하니까. 5년 쯤 만나다보니 함께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라면 잘 살 수 있을 거란 자신도 들었다. 부모님 문제를 제외하고는 나에게 동거는 그다지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가랑잎에 옷이 젖듯, 어느 순간 같이 살 때가 된 것 뿐이었다.
동거할 바엔 아예 결혼을 하지?
같이 살거라고 얘기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했다. 나는 딱히 비혼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아직은 동거만으로도 충분하다. 동거는 둘 만 사는 문제지만 결혼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이다. 나와 닌나 씨, 두 사람을 뛰어넘어 가족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얽히는 것이니까. 결혼과 동시에 부여되는 역할과 선입견과도 맞서 싸워야한다.
'인륜지대사'라 불릴만큼 거대한 인생의 이벤트인 결혼이 어째서 동거보다 더 쉽게 여겨지는 것일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될까? 모르겠다. 동거를 결심한 것 처럼 언젠가 결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은 아닌것 뿐이다. 미래는 알 수가 없기에 현재에 더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기에 '공주와 왕자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의 디 엔드the end가 아닌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의 오픈 엔딩으로 남겨놓고 싶다.
나는 누군가가 책임져야하는 존재가 아니야.
집을 나오고 세 달 뒤 남동생의 결혼식장에서 다시 가족들과 마주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세 달 전까지는 우리 집이었던)부모님 집에 하루 더 머물렀다. 엄마는 여전히 냉담했고, 막내 이모가 나를 앉혀놓고 정신 좀 차리라며 설득을 시작했다. 닌나 씨를 보고 비겁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비난했다. 엄마와 이모의 말이 왜 그런 건지, 무슨 뜻인지도 알고 있다. 동거에 대한 사회적 시선, 특히나 여자가 겪는 불이익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혹시 임신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등이 묻어 있다.
"넌 엄마처럼 살지마. 공부도 많이 하고, 돈도 벌면서 남편한테 큰 소리치고 살아."
내 또래 여자 중 이 말 안듣고 자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중고등학교 때 아빠가 속상하게 할 때면 평생을 주부로 산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대학원을 들어갔을 때 엄마는 누구보다 좋아했다. 박사과정을 가지 않게다고 하자 돈을 다 데줄테이니 공부를 더하라고 권했다. 월급으로 친구들과 여행갈 때 용돈을 드렸을 때, 첫 책 원고비로 선물을 사드렸을 때 엄마는 내가 당당하게 세상에 선 것에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엄마는 내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자라길 바랬고, 그렇게 키웠다. 엄마가 원하던데로, 난 스스로 행복을 찾을 줄 알고 책임도 질 수 있는 존재로 자랐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랬는데 이제와서 남자가 책임져야만 되는 존재로 인식되는 현실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가 하자고 해서 내가 끌려가는 입장도 아니고, 동등하게 이끌어가는 관계에서 책임도 둘 다에게 있는 것이다.
후회를 하면 어떡하냐고 한다. 지금 느끼는 행복은 진짜고, 후회에 대한 걱정은 아직 생기지도 않은 가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건 나만의 해결방안을 찾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어느덧 집을 나온 지 1년이 넘었다. 이제는 간단한 대화정도는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어버이날을 맞아 (일 달 전까지는 우리 집이었던)부모님 집을 찾았다. '어버이날 갈께.' 몇 번이나 카톡을 보냈지만 대부분의 메시지처럼 전부 읽씹당했다.
얼마 전 내가 쓰던 방 전구가 나갔다. 엄마는 없는 사람이라 치고 갈아주지 않고 있다. 충분히 내가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엄마 마음이지 싶어 집에 갈땐 어두운 방에서 생활한다. 티비를 보고 있는 엄마 옆에 가서 계속 말을 붙였다. 얘깃거리를 만들어준 미스터 트롯 멤버들에게 얼마나 감사하던지. 쇼파에 걸터 앉아 티비를 보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작고 외롭게 느껴져 죄인같은 마음이 솟구쳤다.
다음날 집을 나서는데 현관 앞에 짐보따리가 한 가득 놓여있다. 내가 좋아하는 밑반찬과 과일들이다. 요즘 부모님 두 분만 계셔 반찬도 잘 안하는데, 내가 온다고 미리 만들어놓은 것이다. 집에 와서 살펴보니 엄마 냉장고를 탈탈 턴듯 온갖 음식이 다있다. 쌀부터 냉동실에 고이 쟁여놓은 고기와 된장찌개, 두 분 간식거리로 얼려두었던 호떡까지 있다. 외식도 잘 못하는 가난한 큰 딸이 혹시나 굶을까, 미운 딸 떡하나 더준다는 마음으로 바리바리 쌌을 엄마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엄마는 또 저녁을 안 먹었겠지... 밥 잘 챙겨먹으라며 보낸 카톡은 다시, 여전히 읽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