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살이, 그 낭만에 대하여
시골살이는 편의성과 자연을 맞바꾼 현실이다. 자연을 누리는 댓가로 봄여름가을에는 벌레들과 전쟁을 치르고, 겨울에는 살을 애는 추위와 보일러비에 전전긍긍한다. 눈이라도 오면 꼼짝달싹을 못하고 강제 고립이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다가오는 낭만적인 찰나가 시골살이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역시 이 맛에 시골 살지, 되내이게 되는 순간들. 그 찰나는 대부분 자연과 마주하다, 가까이 있지만 평소 느끼지 못했던 존재를 알아채며 일어난다.
오늘은 달이 참 밝네.
어느 날 저녁, 서울로 일하러 간 닌나 씨를 마중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차로 걸어가면서 나도 몰래 이 말이 튀어 나왔다. 달이 참 크네도 아니고 달이 밝다니. 난생 처음 말해본 문장이다. 밝은 조명들이 도시를 밝히고 있는 서울에서는 달빛을 느낄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동그란 달이 어찌나 훤한지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평소처럼 무섭지 않았다. 과거 사람들이 달빛을 벗삼아 산을 넘고, 책도 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 집 안방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다. 불투명 유리로 되어 있는데, 따로 커텐을 달지 않았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달빛이 창으로 들이쳐 밖에 가로등이 있는마냥 훤하다. 은은한 우유빛깔 조명이 무척이나 낭만적이여서 닌나 씨와 둘이 몇 번이나 말한다. 달이 참 밝다-
이곳에 이사온 첫 날. 부모님의 반대에 무작정 뛰쳐나오다시피 한 탓에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잘난 척하며 나오긴 했는데 잘 살 수 있을까. 첫날 밤을 축하하며 기대감과 불안감의 술잔을 부딫쳤다. 담배를 피러 나간 닌나 씨가 급하게 불러 나가보니, 하늘에 별들이 가득했다. 우주에 둘 밖에 없는 듯 고요한 공기 속에 닌나 씨와 손을 마주잡고 있자니 이 사람과 함께 라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할 수 있어. 자신의 선택을 믿어. 새까만 하늘을 수놓은 별들만큼 마음 속 선택지가 넉넉해짐을 느꼈다. 가장 만만한 북두칠성을 찾았다.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나와서 볼 때마다 조금씩 움직이던 북두칠성은 어느 새 365일을 돌아 다시 머리 위로 와있다.
여름에는 근처로 은하수가 지나간다. 테라스에서 별구경을 하고 있는데 눈 앞에 무언가 초록빛으로 반짝이다 이내 사라진다. 이쪽에서 깜빡, 저쪽에서 깜빡- 세상에, 반딧불이다. 저 아래 구례나 무주 쯤 되야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바로 집 앞에 날라다니다니! 청정한 밤공기가 더욱 달게 느껴졌다. 방충망에 올망졸멍 매달려 있는 개구리들까지 사랑스럽다.
뻐꾹뻐꾹. 작년에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 순간 멍했다. 뭐지, 낯익은 소리다. 맞다. 시계 소리다. 어렸을 적 집에는 나무집 모양의 뻐꾸기 시계가 있었다. 정각이 되면 뻐꾸기가 꼭대기 창문을 열고 나와 시간 수 만큼 뻐꾹뻐꾹 울면서 시간을 알려주었다. 가족의 시간을 지켜주던 뻐꾸기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소리마저 기억에서 잊혀졌다.
신기하게도 뻐꾸기의 실제 우는 소리는 시계에서 나던 소리와 똑같다. 올해도 5월이 되자 어김없이 뻐꾸기 우는 소리가 산 너머로 울려퍼진다. 구슬프면서도 정겨운 소리다.
이곳에선 사계절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집 앞 테라스에 앉으면 밤나무 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앙상하던 가지들은 어느새 연두빛으로 물들었다. 곧 새하얗게 밤꽃이 피고, 밤꽃 향기가 흐드러지게 날릴 것이다. 꽃이 지면 짙은 초록색으로 울창해지면서 토실토실한 열매들이 매달리고, 가을의 시작을 알리며 입을 벌리고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앙상해지겠지.
투두두둑.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에 눈을 뜬다. 아파트에 살 때는 비가 오는 지도 모르고 일층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온 적도 여러 번인데, 이곳은 비의 소리가 들린다.
늘 곁에 있지만 느끼지 못했던 존재들... 이토록 소소한 낭만들이 모여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게 아닐까. 시골에서의 시간은 더디면서도 물 흐르듯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