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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환 Oct 04. 2020

<14>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자아정체성 회복과 성취(청소년기에는 자아정체감)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바탕으로 인간은 자아를 찾아서 여행을 떠난다. 나아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등 자기 자신에 대해 여러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아정체성’을 형성한다. 특히 청소년기에 자아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된다고 하니 중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독일 출신의 미국 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의 성격발달이론에 따르면 자아정체성은 청소년기(12세~18세)에 ‘자아정체감’으로 불리며 발달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격발달 이론에 따르면, 태어나서부터 청소년기가 될 때까지 형성된 신뢰감, 자율성, 주도성, 근면성이 융합되어 ‘자아정체감’이 형성된다. 자신의 가치관, 직업, 삶의 철학, 성역할 등에 대한 선택과 결정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통해 ‘자아정체감’을 성취하게 된다. 또한, 자아정체성은 자신이 사는 환경과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확립되기도 하고, 혹은 위기를 맞기도 한다.           


청소년기에 있는 학생들 모두 ‘자아정체감’을 확립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위기를 겪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이유는 에릭슨의 청소년기 ‘자아정체감’ 개념을 확장하여 연구한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마샤의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마샤는 위기와 전념(수행)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경험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 청소년기 ‘자아정체감’ 상태를 ‘정체감 성취, 정체감 유실, 정체감 유예, 정체감 혼미’ 등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여기서 ‘위기’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여러 가지 대안을 비교 및 고민하는 선택하는 과정이다. ‘전념(수행)’은 자신이 고민하여 결정한 부분에 대해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론만 살펴봐도 알 수 있듯이 ‘정체감 성취’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는 모두 정체감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다. 그만큼 청소년기에 ‘자아정체감’을 성취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예상해 볼 수 있다. 실제 나도 학생들의 ‘자아정체감’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조사한 적이 있다. 수년간 방과 후 수업에서 교육심리학을 가르칠 때마다 학생들에게 이론을 설명한 후 자신이 해당하는 상태에 대해 언급해보라고 했다. 조사 표본의 수가 너무 적어서 성급한 일반화가 될 수도 있지만, 매년 25명의 학생 중 20명 내외의 학생들이 정체성을 아직 성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15세~24세 남성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심리학자 필립 메일맨의 1979년 연구에 따르면, 18세 이하의 경우에는 정체성 성취 비율이 10%가 안 된다고 했다.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정체성 성취 비율이 낮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만난 학생들이 '자아정체감'의 네 가지 상태 중 가장 많은 비율을 보였던 것은 ‘정체감 유예’로 아직 자신의 자아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위기 상태에 있으나 아직 전념(수행) 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이해를 돕자면, 부모와 교사 등 어른들의 가치관이나 태도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 방황하는 중이지만 아직 선택하지 못한 상태다. 불안과 방황 속에 있으나 다행인 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정체감 성취에 이르기 위한 과도기 상태다.          


반면, 일부 학생들은 ‘정체감 유실’을 겪고 있었다. ‘정체감 유실’은 ‘정체감 유예’와 반대의 경우다.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려 하고, 누군가 정해준 대상에 전념하고 있는 상태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이 직접 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대상에 몰입해서 전념(수행)하는 상황인데도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가치관이나 태도를 그대로 따르는 중이다. 이런 학생의 경우에는 부모한테 강하게 의존하는 경향(마마보이, 파파걸 등)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게 특징이다.     

     

한 예로, 어떤 학생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정말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외교관이 되기 위해 내신 관리, 수행평가, 학생회 활동, 동아리 활동, 스터디 등 모든 활동을 국제 관련으로 방향을 설정하였다. 근데 이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부모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생과 상담을 깊게 하던 중,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자신이 외교관이 되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자신은 그 부모님의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좋은 결과를 이룰 때마다 칭찬을 받는 게 좋았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기대하고 계시는 부모님이 실망하시지 않도록 지금까지도 외교관이 자신이 갈 길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의 경우에는 ‘정체감 혼미’를 겪었다. ‘정체감 혼미’는 위기(선택에 대한 고민)가 없거나 이를 겪고 있어도 극복 못 하는 경우로 당연히 전념(수행)도 따르지 않는 경우다.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특목고라서 ‘정체감 혼미’를 겪는 학생 수가 그나마 적은 편인 것 같았다. 사실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정체감 혼미’를 겪는 학생을 더 많이 봤기 때문이다. 실제 이론을 살펴보면 ‘정체감 혼미’는 대부분의 어린 청소년들이 겪는 상태라고 했다. 정체감 위기를 경험한 적이 없거나 그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지 못해서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근데 이 조사를 통해서 흥미로운 사례를 얻게 되었다. 어느 한 학생의 경우 네 가지 정체감 상태를 모두 경험했다고 언급했다. 수업 시간에 사정을 다 들을 수 없었기에 추후 이 학생을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별생각 없이 부모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정체감 유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공부하는데 회의감이 느껴져 정체성 혼란(정체감 혼미)이 왔다. 부모 말이라면 너무나도 잘 듣고 따르던 자녀가 갑자기 방황하기 시작하자 부모는 단순히 사춘기가 와서 그런가 가볍게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학생은 심각한 정체감 혼미 상태가 와서 우울증으로까지 이어졌다.           


청소년기 우울증은 자살 충동으로도 이어질 수 있지만, 다행히 이 학생의 부모는 금방 심각성을 깨닫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학생은 휴학했고, 부모 중 한 명도 휴직했다. 그렇게 이 학생은 부모와 세상을 돌아다니며 ‘나를 찾는 여행’을 시작했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체감 유실에서 정체감 혼미로, 그리고 정체감 혼미에서 정체감 유예로, 궁극적으로는 정체감 유예에서 정체감 성취의 상태까지 이뤄냈다.           


미국의 작가이자 의사인 대니얼 드레이크도 “여행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예방약이자 치료제이며 동시에 회복제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학생은 여행을 통해 정체감을 회복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다. 나아가 이 학생은 ‘나를 찾는 여행’을 통해 부모가 바라는 삶이 아닌 자신이 바라는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행가이자 구호 전문가인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 한비야 씨가 “여행은 다른 문화,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학생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행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이 학생의 정체감이 회복되는 과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엔 부모의 선택을 따르기만 했기에 위기를 겪지 않아 ‘정체감 유실’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전념(수행)에 대한 열의도 사라져서 ‘정체감 혼미’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도 ‘여행’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려 정체감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 기간에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위기’를 경험하면서 ‘정체감 유예’를 겪게 되었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대해 아직은 실천하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학교에 복학하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게 되면서 ‘정체감 성취’ 상태가 되었다.           


비록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정체감이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여서 큰 의미가 있다. 왜냐면 많은 학생이 수년간 정체감 유예, 유실, 정체감 혼미 상태로 유지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빠른 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필립 메일맨의 관련된 연구에 따르면 정체성 성취는 15세부터 이루어진다고 했다. 근데 15세에 정체성을 성취한 피험자의 비율은 2% 정도로 매우 적은 비율이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상태보다 성취의 비율이 제일 높게(40%) 나타나는 나이를 21세라고 한 점에서 볼 때 이 학생이 이룬 정체성 성취는 시기적으로도 매우 빨랐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이 학생이 투자한 1년이라는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믿는다.           


나도 과거를 떠올려보면 남들이 좋아 보인다고 말하는 ‘의사, 변호사’와 같은 직업을 쫓았던 것 같다. 부모님도 명문고에 다니는 자식을 보며 기대하는 바가 컸기에 뜻하지 않게 ‘정체감 유실’을 겪고 있었다. 여러 다른 원인도 있었지만,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기도 경험하지 않았고, 전념(수행) 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정체감 혼미’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방황하며 보냈던 고등학교 3년 그리고 재수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체감 혼미를 겪었기에 대학에 입학해서 다시 자아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자아정체성은 한 번에 형성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추구하는 목적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형성된다. ‘자율성’은 아동기에 해당하며 수치심과 반대 개념으로 형성된다. ‘자아정체감’은 우리 인생에 가장 큰 변화가 있는 청소년기에 해당한다. ‘자아실현’은 성인기에 해당되며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사람이 되고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걸 성취하는 것이다. ‘자아통합’은 초기 노년기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인생을 바라던 대로 살았다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인생이 의미 있고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며 다가올 죽음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자아초월’은 후기 노년기에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물질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보는 게 아니라 우주적이고 초월적인 시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인 로버트 클리츠먼이 쓴 《환자가 된 의사들》이라는 책에서도 이미 자아정체성을 확립한 의사들도 우울증에 걸려 환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이미 자아를 확립한 성숙한 의사들도 다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혹시 지금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도 “사람은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진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아는 확립되었다가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열어두고 유연하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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