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맞는 성장 속도 찾기
우리 말로는 ‘적성’이라고 하는 말이 영어로는 ‘aptitude’로 쓰인다. ‘aptitude’는 영어사전에서 ‘capacity for learning’ 또는 ‘quickness in learning’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해석해보면 ‘빨리 배울 수 있는 능력’ 또는 ‘배움의 빠른 정도’를 의미한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에 소질이 있을 때 ‘적성’에 맞는다고 한다. 한국어든 영어든 결국에 ‘적성’에 대한 평가의 잣대는 모두 얼마나 빨리 배우느냐에 달렸다. 그리고 배움이 빠를수록 더 우수하게 평가한다. 하지만 과연 빠르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일지 의문이 든다.
사람마다 배우는 능력이 다르기에 무언가를 배울 때 사람마다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근데 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빨리 배우는 사람을 잘한다고 말하며, 느리게 배우는 사람에 대해서는 못한다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해보면 사실은 누가 먼저 경험했느냐에 따라 더 잘하고 못하고가 달라질 수 있다. 근데 언어 습득의 경우에는 정해진 시기에 습득하지 않으면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신은 공평하게도 인간에게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결정적 시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정적 시기 안에 언어를 습득하거나 배우지 않으면 높은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 참고로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는 만 12~13세쯤이라고 한다. 영화배우 송중기 주연 《늑대소년》이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혹은 우리가 어릴 때 봤던 《정글북》이라는 만화를 기억하는가? 이 두 작품의 주인공은 실제 빅터(Victor)라는 늑대소년을 모티브로 했다. 이는 결정적 시기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다.
1799년 프랑스 남부지방의 아베롱과 타르느 접경지역에서 발견된 만 12세 정도가 된 소년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빅터로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혼자 숲에서 살았다. 빅터를 발견했을 당시 처음에는 말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 네발로 기어 다녔고, 물고 할퀴고 동물처럼 행동했다. 장 이타르라는 프랑스의 한 의사는 빅터를 인간처럼 살 수 있도록 교육하고자 했다. 마치 인간의 탈을 쓴 늑대처럼 행동하는 빅터는 주의력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빅터를 교육하고자 했다. 장 이타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빅터는 겨우 몇 개의 단어만 구사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부적응으로 이른 나이에 죽음에 이르렀다.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를 대표하는 또 다른 일화는 빅터가 발견되고 200년 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만 13세 고립되고 학대받은 지니(Genie)의 사례다. 지니는 정신이상자 아버지의 비이성적인 요구 때문에 작고 어두운 방에서 요람과 의자에 묶여 11년 이상을 보냈다. 아내와 아들이 지니에게 말을 거는 것을 금지했고, 자신은 그녀에게 으르렁거리거나 짖기만 했다. 지니는 다른 소리를 내면 물리거나 매를 맞았고, 완전한 침묵 속에 오랫동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수잔 커티스를 포함한 선생님들과 치료사들이 그녀를 돌보고 교육했다. 하지만 5년 이상의 언어 노출에도 그녀의 언어 능력은 보통 5살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결정적 시기란 우리가 무엇인가 배울 때, 그 시기를 놓치면 절대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뇌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뇌 발달은 유아기에 최초로 이뤄진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도 사실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출생 3세 정도까지 뇌에서는 초기 가지치기를 한다. 그 후 청소년기에 정교한 가지치기가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뇌는 점점 ‘구조화’가 된다.
청소년기의 뇌에서는 유아기 성장에 버금가는 ‘제2의 회백질 성장’이 이루어진다. 회백질은 대뇌를 둘러싸고 있는 피질로 판단이나 의사결정 같은 고차원적 사고를 담당하는 뇌의 부위다. 신경 세포체가 많이 모여 있어서 회색으로 보인다. 이들 신경 세포체는 다른 신경세포(뉴런)와 시냅스를 형성한다. 청소년기에 신경 세포체의 밀도가 더 높아지고 신경세포(뉴런)의 수가 늘어난다. 하지만 10대 후반이 되면 회백질이 얇아지기 시작한다. 시냅스의 가지치기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시냅스의 가지치기는 신경회로가 더욱 정교하게 그 기능을 하려는 과정이다.
시냅스의 가지치기는 우리의 뇌 구조와 기능을 바꾼다는 의미다. 뇌 과학에서 말하는 신경가소성이다. 신경가소성이란 신경세포(뉴런)와 시냅스가 구조적, 기능적으로 유연하게 바뀐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뇌 발달을 기대할 수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인에게도 신경가소성이 나타난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와 같은 결정적 시기와 관련이 깊지 않다면, 성인이 되어서 혹은 늦은 나이라도 무엇이든 새로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교육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IQ라는 것은 누가 만들었을까 고민할 수 있다. 우리의 지능을 측정하는 IQ 테스트의 평가 내용은 사실 과거 지배계층이었던 백인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백인들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만일 백인 문화에 대해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IQ 테스트 결과는 분명 좋지 못할 것이다. 근데 IQ가 적게 나왔다고 그 사람이 멍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학교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을 열등생이라고 규정 지을 수 있을까? 똑똑하고 멍청하다는 기준을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10년 동안 정규 과정으로 배우는 학교 교육도 사실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배 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일본이 한국을 제국주의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귀족 교육이었던 인문 고전 교육을 폐지하고, 노동 계급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프러시아의 학교 교육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 했다. 이런 점에서 피지배계층이 되기 위한 교육 제도에서 잘하냐 못하냐를 가리는 입시제도로 이어지는 모습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은 인문과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일 테니까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학교 교육에 있어서 문제아이자 열등생으로 낙인찍힌 발명왕 에디슨이 가장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에디슨은 초등학교 시절 교사로부터 ‘너무 머리가 나빠서 가르칠 수 없는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3개월 만에 정규 교육을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에디슨이 특별한 천재이자 훌륭한 과학자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어머니 낸시의 노력 덕분이었다. 사람마다 배움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낸시는 에디슨이 자신만의 속도로 배울 수 있도록 인내와 긍정의 마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교육을 했던 것이었다. 이를 통해 배움의 속도보다는 방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력과 청력을 동시에 잃고 장애를 앓는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배움의 속도보다 방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예가 된다. 헬렌 켈러는 시청각 장애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헬렌 켈러는 장애에 대한 차별, 성차별, 인종 차별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신념을 가지고 삶의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배움의 속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덕분에 헬렌 켈러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여학생을 위해 개설한 래드클리프에 입학해 시청각 장애인 최초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로 인해 점차 사람들은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두었고,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인종 차별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비록 남들과는 성장의 속도는 달랐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과 방향성을 가졌기에 가능했다. 인권 운동가로서 세상의 차별을 없애고자 노력한 헬렌 켈러의 삶은 그래서 큰 의미가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우수함을 평가하는 IQ와 테스트와 같은 획일주의적인 지능에 대한 관점을 비판했다. 대신 인간의 능력을 여러 유형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지능은 총 9가지로 언어, 논리 수학, 공간, 운동감각, 음악 리듬, 대인관계, 개인 내적, 자연 관찰, 실존 지능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제시한 다중 지능 이론의 의의는 개인마다 우수한 능력이 다르기에 개별화된 교육과정 속에서 학습자의 지능을 평가해야 한다는 의미다. 누가 무엇을 더 빨리 배우냐 보다는 어느 분야에서 더 두각을 보이는지 개인차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군가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맞는 성장 속도를 찾으라고 말한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훌륭할 것이 없다. 전적으로 훌륭한 것은 어제의 나보다 더 뛰어난 오늘의 내가 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누구와 비교하는 속도 경쟁이 아닌 결국 자신만의 속도를 가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하는 것이 진정으로 훌륭한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나무는 4년간 3cm의 죽순만 자라게 할 뿐이다. 근데 사실은 4년간 땅속에 수백 미터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다 5년째가 되면 6주 만에 30m나 자라 울창한 숲을 만든다. 미국 중동부 지방에 미국에만 사는 매기시카다라는 매미는 17년 동안 땅속에서 유충으로 자란다. 2004년에 성충이 되어 매미 떼가 인디애나에서 버지니아 지역에 6주간 출몰해서 하늘을 뒤덮었으니 이제 2021년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곤충이든 생명체는 각자 종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다르다. 대나무나 매기시카다 매미는 다른 종에 비해 성장의 시간이 유독 길다. 완전한 성장을 이룰 때까지 준비 기간이 길다는 의미다. 비록 시간은 남들보다 오래 걸렸지만 분명한 건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뤘다. 각자에게 맞는 성장 속도를 따랐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 보면 조금 더 빨리 가겠다고 칼치기(?)를 하며 위험하게 운전하는 사람이 있다. 근데 가다 보면 다음 휴게소에서 다시 만나거나 빨라야 목적지까지 5~10분 정도 앞설 뿐이다. 목표와 방향만 확실하다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에게 맞는 성장 속도에 맞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