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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대디 Jul 21. 2020

유학 준비, 호주에 간 공고생 EP2

유학 준비

어학원과 영어


비록 한 달 여행이지만 나는 노스시드니의 이모가 하시는 테이크어웨이 샾 근처의 어학원에서 영어연수를 할 수 있었다. 당시 같은 반에는 한국분 몇 명과 일본에서 온 분들 몇 명이 함께 수업을 들었다. 해외에서 어학원을 안 다녀본 분들이 하시는 말들이 어떻게 외국인과 대화가 가능하냐 라고 많이 궁금해하시는데 가면 그냥 몸짓과 발짓으로 다된다. 특히 당시에는 전자사전이 필수였다. 시드니의 첫인상은 굉장히 촌스러웠지만 하버브릿지와 오페라하우스는 지금도 멋지게 느껴지는 곳 중 하나이다. 낮에 학원이 끝나면 이모가 운영하시는 테이트 어웨이 샾에서 일을 도와드렸는데 나는 종종 카운터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 잠깐 카운터를 본 것 때문에 호주 사람들은 내가 영어를 잘못해도 무시하기보다는 잘 들어준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꿈만 같고 따뜻했던 한 달간의 호주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고 나는 어머니께 집안 사정만 괜찮다면 유학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유학 준비 


한 달간의 호주 여행을 마치고 나는 다시 한국에서 취업준비를 하였다. 당시 내 취업순위가 높았지만 호주를 다녀오는 바람에 많이 뒤로 밀렸는데 그래도 갈 수 있었던 곳이 서울 강동구 쪽에 있는 현대자동차 정비소였다. 이때까지 일반은 종종 했지만 회사에 취업이 된 건 당연히 처음이었다. 회사와 우리 집과의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에 출퇴근이 고등학생에게는 꽤 곤역이였지만 호주 가기 전 돈이라도 좀 모아보자는 심산으로 다녔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자동차 정비를 배우긴 했지만 전혀 관심 없는 분야를 하려고 하니 머리에 들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첫 취업은 내가 배운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일의 강도는 쉽지 않았고 매일매일이 혼나는 것과 실수의 반복이었다. 내가 단지 인정받았던 것은 일하는 형들과의 술자리였다. 술이 꽤 센 편이었기에 형들이 많이 좋아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회사에 20분 정도 지각을 했다. 그런데 하필 아침 조례시간에 회사 사장님이 나와계셔서 나와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바로 그날부로 회사를 나가게 되었다. 나의 5개월간의 회사생활은 그렇게 해고로 종지부를 찍었고 왠지 마음은 후련했다. 어차피 호주를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나있었기 때문에 해고된 것에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2001 호주유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다음 달 3월에 호주 시드니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계셨기 때문에 무척이나 걱정을 했지만 함께 가는 동행자 승용이라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함께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시드니시내에 있는 영어 어학원에 등록이 되어있어서 5개월간 다니게 되었다. 어학원에 처음 가게 되면 반배정을 위해 영어 레벨 테스트를 보는데 우리 둘의 생각은 당연히 가장 밑에 반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반배정 시험이 시작되었고 나와 인터뷰를 했던 선생님은 내가 말하는 것마다 굿을 연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나와 승용이는 같은 반을 생각하며 결과를 기다렸는데 승용이는 가장 밑 에반인 Elementary 반으로 나는 가장 위에 반 바로 밑인 upper intermediate 3 반으로 배정이 되었다. 처음엔 그 반이 높은 줄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가보니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서 멘붕이 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높은 반에 들어갔지 하고 생각해보니 예전에 한 달간 호주 여행을 왔을 때 카운터를 보면서 호주인들은 영어를 잘못해도 무시하는 것보단 잘 들어준다는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반배정 인터뷰를 볼 때도 자신감 있게 했던 것이 높은 반으로 이끌었던 거 같다.


어학연수와 한국인들 그리고 교회


호주에서의 어학연수 당시에 학원에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많았고 가끔 유럽 사람들이 있었다. 타지에 가면 한국사람들과 놀지 말고 외국 친구를 되도록이면 사귈 수 있도록 노력해봐라 라는 말이 그때도 있었지만 타지 생활은 외로움을 동반하기에 그것은 참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한국사람들과 몰려다니며 여행도 하고 함께 공부도 하는 시간들을 자주 갖게 되었다. 주말마다 이모에게 이끌려 교회라는 곳을 처음 나가게 되었고 그 교회는 시드니 한인교회 중에서도 규모가 컸기 때문에 마치 한국에 온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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