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에 간 이유는 '길일'을 받기 위해서 였다. 때마침 사회생활하며 만났던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나와 약 3개월 차이로 결혼을 한 그는 얼마전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실은 나도 아이를 가지고 싶은데..'라는 이야기를 내뱉자 마자 그는 '당장 병원에 가라'고 말했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가 정해준 길일(?)에 잠자리를 가지고 바로 속전속결 아이가 생겼다며, 성격 급한 나에게 딱 맞는 해결방법이라고 권했다. 맞는 말이다. 병원에 가서 길일을 받아 오자. 지루한 백수 생활에 미션이 주어졌다.
신랑은 숙제(?) 날짜를 받으러 바로 난임클리닉에 가겠다는 말에 반대의사를 내비췄다. 둘다 신체가 건강하고 젊은데 굳이 그런데 갈 필요가 없으며, 임신을 결정한지 아직 한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너무 성급하다는 의사였다. 하지만 나는 만에 하나 문제가 있을 시를 빠르게 대비해서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강력하게 어필했으며 훈삼이도 내뜻에 의견을 굽혔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첫 병원은 훈삼이 회사 앞에 위치한 대형 여성병원이었다. 일반 부인과와 산과, 소아과, 그리고 난임센터가 운영되고 있었다. 훈삼이는 평소에도 내가 가는 모든 병원에 따라 가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어 그의 회사 근처를 일부러 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테이프를 잘 끊었다는 생각이 든다. 임신은 분명 남여가 함께 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며, 훈삼이 역시 이러한 역사적 이벤트에 별책부록처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모든 단계마다 그와 함께 할 수 있기에 그나마 많은 사건사고를 긍정적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직장 근처의 단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첫날부터 병원을 옮길 때까지 빈번히 신랑 회사 동료를 만났다. 배가 볼록하게 나온 여성분들도 있었고, 부인과 함께 온 남자분들도 계셨다. 다들 출산문제로 방문한 사람들이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장소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물론 반갑고, 이것저것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다. 하지만 여성병원이라는 TPO가 딱히 훌륭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랑의 동료를 만나기란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아무 적의없이 묻는 일반적인 질문에도 위축되고 불편했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하는 뻔한 인사치레에도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숯기없고 내성적인 부인 코스프레를 했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온 것도 아닌데 가슴 한구석에서는'나나 신랑이 어디 하나 못나서 온 사람처럼 보이면 어쩌지' 하는 그런 불편한 자존심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