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강 작가의 책을 그렇게 읽어선 안되었다
남들도 다 겪는 중2병. 나의 허세는 “문학”이었다.
중학교 2학년, 2002년은 나에게 지옥을 안겨준 해였다. 반에서 잘나가는 아이에게 ‘키가 크고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고, 딱 하나 있던 내 친구를 다른 여자아이가 무리에 친구들과 소원해지자 빼앗아갔으며, 만화가를 꿈꾸며 손가락에 굳은살 도려가며 그려둔 그림들을 어머니가 폐지로 버렸다. 가족은 울타리가 되지 못했고, 학교는 도피처가 아니었으며 정붙일곳 하나 없어 늘 겉돌았다. 어디 말로 풀 곳이 없어 한 두줄 일기를 썼고, 때마침 열린 <사랑의 편지쓰기 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자 ’글을 잘쓴다’고 주변에서 추켜세웠다. 쭈구리였던 나는 단숨에 글 잘쓰는 학생이 되었고 교내 백일장은 물론 학교 대표로 나간 대회에서도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는게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를 눈여겨 본 선생님이 ”쟤 평소에 책을 많이 읽더라고요“라고 말을 더했고, 그 후 선생님과 아이들은 나에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에이, 책 많이 읽는다면서 남들도 다 아는 책을 소개해?’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반짝인기가 금세 사그라들까 불안했다. 손가락 한 마디 깊이의 밑천도 바닥날것같았다. 그리고 그걸 들키고싶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여야 되는구나”를 깨달았다. 그러기위해선 그럴싸한 책을 소개해야했고, 도서관에 가서 “있어보이는” 고전문학,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고전문학전집>, <삼국지>, <톨스토이 단편선>, <토지> 등 닥ㄱ치는대로 읽었다. 그렇게 내 중2병은 시작되었다. 어려운 책을 완독했다는 성취감계과 ‘와, 너 그 책을 읽었어?’ 라는 약간의 우월감. 딱 그걸 위해서 ‘허세로운 책’을 읽었다.
등산가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듯 책을 읽었다. 과학자가 새로운 연구성과를 발표하듯 서평을 썼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허영심과 우월감을 위해서 읽은 책은 감히 서평을 쓸 수 없었다. 그건 내 마지막 양심이었다.
작가가 되기에 내 이름은 너무 평범하다고 이름탓을 했을때 ‘한강’이라는 이름을 보고 명작가는 이름부터 다르다고 생각했다. 힘있고 강렬하면서 간결한. 이름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강단과 더불어 작품도 그럴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를 사들고와서 단숨에 읽었다. 읽고나서 주변에 ”부커상을 받은 한강 작가를 아세요?“라고 말하고싶었다. “한강 작가는 좀 달라. 그는 시대를 관통하는 남다른 눈을 가지고 있고, 그걸 펜으로 기록하지. 아주 대단한 작가야“ 라는 내 감상도 돋보일것같았다. 책장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세워뒀다가 책을 좋아하는 손님이 오면 선물로 나눠줬다. 책이 나를 떠나는 마지막까지 “허세“였다. <채식주의자>는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왜저래?’만 반복했다. 이들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고2 담임선생님께서는 굉장히 깨어있고 의식있는 분이셨다. 덕분에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제대로 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잘 알고, 더 깊이 배워서였을까. <소년이 온다>는 책의 첫 페이지를 열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막상 책을 열고나선 단숨에 읽었지만 인간으로 느낀 “불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한다“는 신념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 솔직한 감상을 남에게 보여주긴 싫었다. 그 대단한 작가의 책의 감상이 고작 그거니? 너 제대로 읽은거 맞아? 누군가 나를 꿰뚫어보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그냥 “한강 작가의 책은 읽어봤죠“ 한 마디와 단편적인 감상, 나는 도저히 따라할 수 조차 없는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표했다. 그럴수록 난 쓰는사람은 커녕 제대로 읽는 사람도 되지 못하는구나... 남의 신경따윈 쓰지않는주제에 왜 이렇게 이 분야에서는 있어보이고 싶었을까. 그건 내가 누구보다 이 분야에 발이라도 좀 담그고 싶다는 열망이 있기때문일것이다. 글쓰는 사람이지만 번듯한 작가도 아니고, 책은 많이 읽지만 좋아하는 책만 수백 수천번보고, 문학적 허영심을 충족하고자 그럴듯한 작품을 찾아다니는. 나는 딱 이정도의 사람인거다. 다만 그걸 진짜 인정하는순간 주저앉을것 같으니 애써 외면하는중이다.
10월 10일 목요일 밤 10시. 나는 아이들을 재우고 있었다. 늦은 육퇴를 하고 휴대폰을 들여다봤는데 늘 이시간엔 조용하던 피드가 떠들썩하다. 출판사, 작가, 일반인 너나할것없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언젠가 ‘넌 외국서적은 안 읽냐?’는 질문에 ‘저는 번역서는 되도록 안 보고, 본다해도 번역가를 먼저 봅니다’고 답했었다. 한글도 그렇지만, 다른언어도 제아무리 잘 번역한들 그 나라의 “말맛”과 “뉘앙스”, “사상”을 온전히 담기란 힘들것이다는 허세 반, 진심 반이 이유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을 읽어도 솔직히 ‘이 작품이 노벨문학상의 가치가 왜 있지?’라는 옹졸한 의심이 먼저 고갤 들었지만, 이 또한 ‘허세로움’으로 덮고, 몇 마디 문장과 단어로 그럴싸하게 감상을 전하곤했다. 이젠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을 “원문 그대로”볼 수 있다는게 얼마나 신나던지!
그런데 기쁨도 잠시. 한강 작가의 책을 추천해달라는 연락이 빗발쳤지만 나는 한 줄을 쓰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어, 내가 책을 추천해도 되나? 이게 맞나? 내가 이 책을 정말 읽었다고 할 수 있나?
나는 한강 작가의 책을 그렇게 읽어선 안 되었다. 지적 허영심을 채우고 그럴싸한 문학인을 흉내내고 싶어서 그 대단한 책을 대단한 척하며 봤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창피함이 몰려왔다. 책을 읽고나서 쓴 한 두줄의 솔직한 후기를 전했고, 대략의 줄거리나 주제도 듬성듬성 기억나는대로 알려줬다. 당당하지 못했다.
오늘 모처럼 B언니를 만났다. 문학적 소양은 물론이거니와 워낙 따스한 이라 내 솔직한 고백을 털어놓을 유일한 사람이었다. 만나자마자 노벨문학상 이야기로 떠들었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언니 사실은요... 너무 부끄러웠어요... 횡설수설 요점없이 부끄럽고 창피함만 잔뜩 말했다. 늘 그랬듯 언니는 내 말이 마치기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후우 한숨을 쉬자 언니가 “괜찮아요, 그럴 수 있지”라고 해줬다. 솔직한 고백과 담백한 위로. 그제야 나는 부끄러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그러고나니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의 인물들이 스쳐갔다. 그들의 이야기가 들렸고 썰물처럼 나갔던 감상이 물밀듯이 밀려와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이 책들을 다시 읽기로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