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의 윗니가 달랑달랑 흔들린지 한 달이 넘었다. 치과에서는 자연히 빠질때까지 그냥 둬도 되는데, 아이가 불편해하면 빼도 된다고 했다. 뿌리가 거의 다 뽑혀 잇몸 끄트머리에 치아 뿌리가 살짝 걸쳐진 정도라 슬쩍 건드리기만해도 빠질거고 아프지 않을거니 편한대로 하란다. 아이가 하도 거치적거린대서 빼주겠다니 그건 싫단다.
지난주 수요일. 하원길에 아이가 대뜸 이가 썩은거 같다고 입을 아 벌렸다. 어디가 썩었냐고하니 빠질것 같은 이가 썩어서 새까맣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상식적으로 다 빠진 이가 갑자기 썩었다는게 말이 안되서 보니 정말 치아 뿌리가 까맸다. 분명 어제 저녁까지도 말짱했는데 무슨 일이지? 내 상식이 부정당하는건가? 아니 어떻게 다 빠져나온 치아 뿌리가 썩지? 내 기억이 잘못되었는지 몇 번이나 복기해봐도 의아했다.
첫째는 가뜩이나 이가 안빠져서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이젠 충치까지 보이니 영혼이 반쯤 나갔다. 나 이제 어떻게 하냐, 치과에서 또 묶여서(치료를 받는데 난동을 부려 부득이 벨트로 몸통을 묶었었다.)아픈거 해야하냐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이를 뽑으면 썩지 않을거랬더니 그건 또 싫다고 입을 틀어 막았다. 밥도 제대로 못먹었어 엄마. 끼니때 밥을 못먹으면 큰일나는줄 아는 애가 점심을 굶었다니!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붕어빵 한 개를 허겁지겁 먹고 진정이 되자 나는 이를 다시 보여달라고 했다. "절대절대 이를 만지면 안돼.", "응 그래. 만약 엄마가 조금이라도 만지면 오백원 줄게", "...그럼 좀 만져도 괜찮아" 역시 자본주의세상에 돈을 걸면 못할게 없다. (내심 "엄마가 슬쩍 건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분명 치아뿌리는 까만색이었다. 어떻게 이게 갑자기 생긴거지? 처음엔 김이나 미역이 묻은건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겉부분은 반질했다. 정말 뿌리 안쪽이 썩은건가? 그래서 이가 빠지나? 그런데 치과에서는 괜찮다고 했는데? 직접 살펴보면 해답을 찾을것 같았는데 나까지 걱정이 늘었다. 그냥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입을 틀어막아버려서 그럴 수도 없었다.
저녁에 뭘 먹여야하나... 먹고싶은걸 물어봤다. "엄마... 나 이빨이 빠지는거면 뭐든지 먹을 수 있어"
나는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되겠군. "오이를 먹으면 충치가 딱 박혀서 쏙 나올거다", "따끈한 물을 마시면 잇몸이 말랑해져서 이가 빠질거다", "버섯은 말랑말랑한 마이쮸같아서 이걸 씹으면 달랑대는 이가 툭 하고 뛰쳐나온다"면서 채소를 먹었다. 평소였음 "거짓말 하네"라고 콧방귀도 안뀌었을건데 여덟살 인생 최대의 시련 앞에 판단력이 흐려진 아이는 덥석덥석 잘 먹었다.
양치도 못하겠다 해서 가글로 대충 입을 헹궜다.자리에 눕다말고 첫째가 벌떡 일어났다. 혹시 자다가 이가 빠져서 삼켜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럼 응가로 나올거야라고 답하니 똥꼬에 딱딱한 이빨이 끼면 쉬랑 똥을 못누잖아. 괜히 답해서 더 큰 고민을 더해버렸다. 삼키지 않게 마스크나 비닐봉지를 입에 달면 어떨까? 하니 그건 또 답답해서 싫다고 훌쩍거린다. 엄마가 옆에서 지키고 있다가 이가 빠지면 주워주겠다고 약속했더니 "그럼 엄마가 잠을 못자잖아... 엄마는 자다가 깨면 화를 내잖아..." 효녀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말을 남기고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이는 그대로였다. 간 밤에 이가 안빠져서 다행이 반, 안빠진 이를 그대로 둬야하는 걱정 반. 오후에도 까만 이는 그대로 있었다. 이틀 동안 아이도 나도 완전히 지쳐버렸다. 치과에 가서 해결하자고 했더니 충치를 가지고 치과에 가면 치료 받아야해서 안된다고 주저앉아버렸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싫고, 이를 보면 힘들고, 그걸 보는 나도 점점 지쳐가고....그런데 그날 저녁. 자기 전에 양치를 하는데 칫솔에 작은 티끌이 나왔다고 나에게 그걸 들고왔다. 검정깨였다. 대수롭지 않게 빼주고 다시 입을 헹구고 오라고 보냈다. 어? 갑자기 뭔가 스쳐 지나갔다.
나>혹시 어제 급식에 이런 검은깨가 나왔어?
첫>으응 그랬던것 같아.
나>너 이 다시 보여줘. 아무래도 까만깨가 낀 것 같은데
첫>(입을 막으며)으응 싫어!
정황상 저 검은색의 정체는 깨같은데, 아이가 너무 싫어해서 확인을 못했다. 썩은게 아니고 까만 깨가 들어있는거라고 말했지만 믿지 못하고 엄마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이를 뽑으려고 한다며 오해까지 샀다.
다행히 이튿날 저녁에 이는 빠졌다. 빠진 이 속을 들여다보니 검은깨 한 알, 약간의 고춧가루가 들어있었다. 저 조그만 참깨가 뭐라고 우리 둘 다 3일을 고생했나 몰라. 허탈함에 실소가 터졌다.
아이는"엄마 말이 맞았는데 아니라고 해서 기분나빴지?" 슬쩍 말을 걸었다. 나도 좀 더 꼼꼼하게 살피고 썩은거 아니라고 차근차근 알려줬어야하는데 무작정 우겨서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 근데 까만깨가 어떻게 들어간걸까? 나는 먹은 기억이 없는데?" 내가 이걸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것 때문에 마음졸이고 울고불고한게 꽤 억울했는지 "엄마 다음부턴 까만깨는 안먹을거야"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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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치아 속 참깨같은 일이 종종생긴다. 전혀 생각치못한게 갑자기 튀어나와 삶을 잔뜩 헤집어놓는다. 하찮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걸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상상의 나래를 잔뜩 펼쳐대고, 그러다 나중에 어이없어하고. 실체를 알면 참 별것 아닌데. 별안간 들어온 참깨가 내 삶을 초조해하지 않게, 정신 바짝 차리고 더 꼼꼼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