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주제:빈티지
기성복. “일정한 기준에 따라 미리 여러 벌을 지어 놓고 파는 옷”이란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언제나 기준치 이상의 몸을 가져서 기성복 중 내게 맞는 옷을 찾는게 참 어려웠다. 내눈에 괜찮은 옷 중 꼭 맞는 사이즈는 잘 없었다. 팔과 허리가 긴 탓에 블라우스와 남방은 너무 짧았고, “한국 표준 여성”의 몸보다 커서 보세옷은 거들떠도 보지 못했다. 그나마 SPA브랜드 옷들은 사이즈와 취향이 맞았지만, 옷의 질, 그리고 패스트패션을 소비하는게 영 꺼림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대구 동성로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옷들을 주렁주렁 널어놓고 파는 골목을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옷들은 똑같은게 하나도 없었고, 옷의 상태도 제각각이었다. 이 와중에 내가 찾던 니트 원피스를 발견했는데, 보풀은 좀 일었지만 입는데 문제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옷이 나에게 맞춤한 듯 꼭 맞았다. 가격은 3천원. 0이 하나 덜 붙은거 같아요...라고 했더니 그 가격 맞단다. 그렇게 <구제>의 길에 들어섰다. 저렴한 가격에 단 하나뿐인 옷이라는점이 좋았고, 운이 좋으면 손때묻은 명품도 가질 수 있었다. 여행을 갈 일이 생기면 그 지역에 구제가게를 찾아다녔고, 이후엔 괜찮은 구제옷을 고르는 눈이 높아져서 실패 확률을 줄여나갔다.
언제부턴가 구제는 “빈티지”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구제라고 하면 퀘퀘한 냄새가 날 것 같은데, “빈티지”라니까 멋스럽고 유니크해보였다. 처음엔 이 빈티지 열풍이 좋았다. 다양한 가게도 생기니 옷을 고르는 폭도 넓어지고 일본, 유럽, 미국 등 세계 곳곳의 옷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빈티지라는 이름값이 점점 높아지면서 “고퀄리티”임을 강조한 가게들이 생겨났다. 세련된 디스플레이에 그럴듯한 스타일로 꾸며놓고 기성복 못지 않은 가격을 받는 곳이 많아졌다. 공짜로 버린 옷이 복잡한 유통과정을 거치면서 옷값이 붙었다. 명품잠바나 시장옷이나 버릴때는 0원이었는데, 빈티지매장에 걸리는 순간 ‘명품’은 명품값을 하고 시장옷은 그대로 돈을 받는다. 수준은 구제면서 돈은 기성복으로 받으니 저렴하게 만만한 옷을 샀던 나는 낭패였다. 나처럼 사이즈가 없어서 구제옷을 찾던 이들의 자리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빈티지매장에 가보면 스몰과 미디움 사이즈가 대부분이고, 77사이즈 이상은 보기 더 힘들어졌다. 빈티지매장은 점점 늘어나는데, 왜 사이즈의 범위는 줄어드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빈티지매장도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열풍이 뜻밖에 변화를 가져다줬다. 우선 새 옷을 사지 못하니 기존에 입던 옷만 강제로 입게 되었다. 싼 맛에 사놓고 안 입었던 옷을 다시 꺼내고, “역시나 못 입겠다”싶은건 알뜰장터나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다. 가격보다는 꾸준히 입을 옷을 사게되었고, 일주일에 절반 이상을 그 옷들만 번갈아 입었다. 이렇게 2년을 보냈더니 옷장이 널널해졌다. 그리고 구매 후 죄책감과 후회가 없어졌다. 이제는 옷 한 벌 살 때 신중해졌고, 그렇게 산 옷은 판매자가 뿌듯해할정도로 입고 다닌다.
얼마전 10년 넘게 입던 니트가디건에 구멍이 나서 버렸다. 그날 오후 빈티지 매장을 지나는데 내가 버렸던 옷과 비슷한 길이, 독특한 디자인의 가디건을 봤다. 새로운 10년을 저 옷에게 맡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원의 선순환이 별건가, 내가 잘 입고 미련 없이 버리는거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