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과 미니멀 사이

쌓여가는 취미가 꼭 좋은것만은 아니다

by 리다

나는 소문난 덕후다. 만화덕후, 뮤지컬배우 덕후.(정확히는 '최수형 배우 덕질')만화책은 좋아하는 작가 위주로 사모으고(박완서 작가님도 좋아해서 그분의 작품을 모두 사모으는 중)배우님은 기간은 길지 않지만(그리고 요즘 공연을 안하셔서 잠정중단중)배우님 출연 리플렛, 사진, 사인 등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거기다 자잘한 소품, 편지지, 귀여운 MD상품 등 웬만한 소품샵 못지않게 한가득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내 남동생도 대단한 장난감 덕후에 레고덕후인데, 동생은 이것을 살려 작가로 활동중이다) 20대때부터 모았던 것들 모두 신혼집에 들고갔고, 갖가지 소품이 그득한 곳에서 살았다.

그러다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삿짐센터 사장님이 견적을 보러 오셨는데, "으흠"하시더니 '짐이 너무 많아서 1톤 차를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고 하셨다. 당시 우리집은 20평 구축아파트였고 큰 가구라곤 쇼파와 침대(식탁도 없었음), 두 개의 서랍장이 전부인데 무슨 짐이 많지? 의아해서 여쭤보니 사장님 말씀이 "큰거 말고 잔짐이 참 많네요. 사모님 저기 자잘한 짐들이 큰거보다 더 공간을 많이 차지합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여차하면 여기는 짐이 더 늘겠다면서 두 달 정도 남았으니 그동안 짐을 좀 줄여보라고 하셨다. 사장님이 볼땐 큰차한대에 1톤차 하나는 기본이고, 차가 두번 왔다갔다 할 거 같다고 했다. 차 한대 추가될때마다 15만원이 더 드는데 본인이 보기에도 그 돈이 좀 아깝다면서, 라면박스로 세 개 정도의 짐만 버려도 차 두번 추가는 안해도 되겠다셨다.


그러면서 사장님이 "사모님 집이 안그래도 작은데, 짐때문에 숨이 턱 막히지 않았어요?" 사장님은 "너무 쥐고 있지 말아요. 버려야 또 채우죠"라고 하시며 가셨다.

다음날 동네마트에가서 라면상자 세개를 얻어왔다. 가져오면서도 상자 세개가 너무 큰데 다 채워질까? 했는데, 한시간 뒤에 박스 두갤 더 가져와야했다. '1년 이상 안쓴건 버리자', '지나간 추억에 연연하지 말고, 앞으로 채울것을 생각하자' 두 가지만 생각했다. '이건 비싸서 못버리겠어', '아 이건 살빼고 입을거라고 산건데' 하던 옷들만 두박스가 거뜬히 넘었다. 귀엽다고 옹기종기 몇 개씩 모은 피규어 중 색이 바래고 깨진것, 제기능을 상실했지만 예쁘다고 놔뒀던 스탠드, 여기저기 사은품으로 받았지만 한번도 쓰지 않은 텀블러와 밀폐용기, 컵 등등. "엥 이런것도 있었나?"했던것도 있고, "이걸 내가 입을거라고 가지고 있었나?", "이걸 내가 돈주고 샀다고?"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했던 옷, 가방, 장난감, 소품들이 다시보니 진짜 애물단지였다. 개중엔 선뜻 버리기 아까운 것도 있었다. 그런것들은 따로 뒀다가 다음날 다시 보고 '그래도 안쓰겠다'싶은건 과감히 버렸다.

그렇게 라면 다섯박스를 꽉 채워서 미련없이 버렸다. 나눔을 할까 했지만 그걸 분류하기도 번거롭고, 막상보니 남에게 줄만큼 변변한것도 없었다.

이삿짐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사장님 다섯박스 버렸어요'라니까 '아이구 사모님 잘하셨어요!'하고 칭찬해주셨다. 이후 이삿날 주방이모님과 사장님이 한번 더 둘러보시더니 이정도면 큰 차랑 작은 용달 한개 정도면 충분하겠다고 했다. 물건이 확 줄어서 정리도 금세 끝났다. 버린 물건에 대한 아쉬움보단 정리가 수월해진게 더 좋았다.


이왕 시작한거 좀 더 정리하자 싶어서 그 동안 모은 리플렛과 굿즈도 정리했다. 내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리플렛, 배우님 연기가 특히나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던 리플렛, 내 배우는 나오지 않았지만 감명깊게 봤던 것 외엔 다 정리했다. 1/2정도 버리고 나선 부피를 줄여 잘 보관하는 방법을 생각했고, a4파일에 보관하면 보기도 좋고 보관도 편하겠다 싶었다. 통상 리플렛들이 쫙 펼치면 a4사이즈라 딱 좋았다. 쌓아만 뒀던 것들이 정리되니까 리플렛이 더욱 빛났다. 굿즈는 사용이 불가한것, 소장가치가 없는것은 다 버렸다. 이것도 저것도 다 소중한거라고 긁어모으듯 수집했던것이 다시보니 이걸 왜 지금껏 쌓아뒀다 싶었다. 책장을 세칸이나 차지했는데, 정리하니 한칸 딱 가득찼다. 빈공간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슬프게도 이후 공연을 보러가지 못해서 반강제로 미니멀한 덕질을 이어오고 있다. 채우고 싶은데 공연을 못보러가니 이게뭔가 싶다가도, 아쉬운대로 있는것을 다시 찬찬히 보며 옛 추억을 되씹는것도 재미있었다.


컵과 그릇은 가장 버리기 아까웠다. 특히 레트로컵의 경우 일부는 내가 샀을때보다 더 비싼 가격에 되팔수도 있엇다. 하지만 찾아보니 그건 '새상품'일 경우지 나처럼 사용감 있는 것을 소장용 가격으로 사는건 극히 드물었다. 그릇은 우선 저렴한 순서대로 버렸다. 고가의 도자기접시는 앞으로 쓸일은 없을건데 버리기가 너무 아까웠다. 때마침 친한언니의 오빠가 자취를 하게 되어 그릇과 컵이 필요하다고 했다. 언니에게 슬쩍 말하니 흔쾌히 달라고 했다. 접시 가격을 뒤늦게 알고나선 너무 좋은걸 줬다고 밥도 얻어먹었다. 커트러리와 칼, 묵혀둔 손님용 접시도 아낌없이 챙겨줬다. 흠집이 많이 난것을 버리려고 빼놨는데 '오빠 혼자 쓸거니까 괜찮다'고 그것도 싹 가져갔다. 언니는 오빠네 훨빈한 자취방이 덕분에 꽉 찼다고 무척 고마워했다. 내 접시들이 드디어 제자릴 찾았구나 싶어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이후 두 번의 이사를 더했고, 그때마다 정리하고 버리길 반복했다. 아이가 하나에서 둘로 늘고나선 버리고 채우자고 하면서 둘째가 쓰지 않는 장난감, 보지 않는 책, 작아진 옷은 다 처분했다. (셋째는 없다!) 어머니가 '그걸 왜버리냐, 동생 애 생기면 물려줘야지'라고 핀잔을 했지만, 언제 생길지 모르는 조카때문에 짐에 쌓여살기 싫었다. 묵은 이불도 어머니에게 갖다줬다. '너흰 그럼 뭐 덮고 사냐'고 했지만, 덮는이불, 깔아두는이불, 애들여분이불을 다 챙겨놨는데도 꺼내지도 않는 이불이 어찌나 많던지! 거기다 이불은 공간도 많이 차지해서 여러모로 짐짝이며, 우리집에 숙박하는 손님도 오지 않아서 필요가 없었다. '언젠가 쓸때를 대비해서'보단 '그건 그때 있는걸로 때워보자'는 심산으로 되도록 다 치우고 버렸다. 신기하게도 그많은 짐들을 정리했지만 '아 그거 버리지 말걸'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빈 공간이 생길때마다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앞으론 '하나 사면 두개 버려야한다'는 생각으로 살기로 했다. 깔끔하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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