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일머리

도시락 혼밥덕에 만렙인턴되다

by 리다

대학교 2학년때 pc방 카운터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참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쳤다. 2-3개월 짜리 아르바이트도 있었지만 대부분 1,2일 하는 단기 아르바이트 위주로 일했다. 입시미술학원 석고모델, 도넛가게 오픈 이벤트 진행, 전단지 돌리기, 영화관 매점, 교육청 수능시험지 분류, 동영상 자막달기 따위를 하면서 돈 모으는 재미와 노동의 보람을 참 일찍이 깨우쳤다. 단기아르바이트는 짧은시간에 비교적 높은 일당을 주고 일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 좋았지만, 항상 새로 시작해야했고 그걸 일일이 알아보는게 참 번거로웠다. 그러다 안정적으로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있나 하다가 교내에서 하루 4시간 일할수있는 '행정인턴십장학생'(근로장학생과 비슷함)제도를 알게되었다. 평일 하루 네시간씩 교내에서 일하는데다 업무강도도 비교적 낮은편이고(행정실이나 학과 사무실, 도서관 보조업무)무엇보다 시급이 센편이라 인기가 많았다. 되면 좋고, 안되면 할수없다 싶다가도 이왕이면 경쟁률이 낮아 당첨되기 좋은곳으로 하자 싶어 찾다가 그때 처음 개관한 법학전문대학원 행정실에 사람을 구한다는 것을 봤다. 단과대학에서 좀 떨어진 건물에다 신규로 생긴곳이라 그런지 지원자가 거의 없었다. 문과대학에선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망설임없이 지원했는데 당첨이 되었다. 얼떨떨하게 행정인턴십 장학생이 되어 근무를 시작했다. 나의 업무는 간단했다. 오후 1시에 출근해서 행정실 선생님들 티타임 준비, 설거지, 행정실 옆 교수님휴게실에 비품확인, 교수님 우편물 분류하기. 나머지 시간엔 본인 공부를 해도 좋다고 하셨다. 처음 일주일동안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행정실에서 일하는 선생님, 교수님 익히기에 정신이 없었다. 차츰 일이 익숙해져서 선생님들과 농담도 주고받게 되는 여유가 생겼다. 선생님들은 모두 일도하고 공부도 하는 나를 참 예뻐해주셨다. 좋은거 있음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고, 시험기간이나 과제가 있으면 빈 강의실에 가서 공부하다가 필요한것이 있으면 부르겠다고 배려해주셨다.


난 돈 받은 이상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업무에 익숙해지고 난 후 행정실과 교실, 휴게실 등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할만한 일이 뭐가있나 찾아봤다.

청소는 도우미 이모님들이 계셔서 안해도 되었는데, 항상 선생님들이 가장 바쁜 시간인 2-3시에 행정실 휴지통을 비우러 오셨다. 서로간에 좀 불편하겠다 싶어서 행정실 선생님들 개인 휴지통은 내가 비우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휴지통 해봤자 쓰레기가 없는날이 대부분이라 치우는건 일도 아니었다. 도우미이모님들께 탕비실 휴지통 비우는 김에 행정실 선생님들것은 제가 정리해서 따로 화장실에 두겠다고 했더니 이모님들이 너무 고맙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큰 휴지통은 우리가 비워서 같이 치울거니 그건 두라고 업무를 정리해주셨다. 그다음으로 한것은 각각 선생님들이 오후 티타임에 주로 뭘 드시는지 봤다. a선생님은 언제나 믹스커피를 드셨고, b실장님은 따끈한 차, c선생님은 본인것을 들고오시는등 거의 매일 같은것들을 드셨다. 미리 '오늘은 이걸 부탁한다'고 하지 않으면 같은것을 드렸다. 그러다 요령이 생겨 날씨가 궃은날이나 더운날, 특별히 좋은 음료가 있는날엔 다른것을 권하고 보통은 늘 같은것을 드렸다. 한달쯤 지난날, 행정실 업무를 총괄하는 권선생님께서 '선생님이나 교수님께 커피 심부름 하는거 어때?'하고 물으셨다. 나는 제 업무니까 당연히 해야죠, 라고 답했던거 같다. 그랬더니 권선생님께서는 기특하다고 하시며 말을 이으셨다. "커피 심부름이 보기에는 허드렛일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아. 손님이나 선생님들과 말도 한번 더 틀 수 있고, 받는 사람들도 이런 부분을 보면서 '아 저런 학생도 있구나'하고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란다. 그리고 선생님들, 교수님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눈여겨볼 수 있고. 거기다 내가 보니 다현씨는 참 일을 잘할것 같아. 우리가 말도 안했는데 알아서 어떤것을 먹는지도 다 파악하고, 음료를 내올때도 받는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보여 참 기특해. 뭘 해도 참 잘하겠다." 뜻밖에 칭찬을 받아 얼떨떨했다. 내가 내 일을 했을뿐인데 너무 큰 칭찬을 받은것이다. 이후 다른 직장에 들어가서도 늘 내가 커피심부름을 했는데, 딱히 이게 힘들거나 부당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권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내가 왜 이런걸 해야해?'라는 생각은 없었고, 이걸로 오신 손님들 말이라도 트지, 사무실 분위기가 좋아지겠다 하고 뿌듯해했다.

권선생님께서는 다음날부터 손님이 오시면 차받침대는 이걸 꺼내면 되고, 잔이나 컵, 쟁반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셨다. 내가 손님들 오실때 같이 낼 티슈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바로 사다주셨다. 마냥 어렵게 느껴진 분이었는데 내가 예쁨 받는다는 기쁨이 참 컸고, 실망시켜드리지 않고자 더 정신차리고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근무했다. 보통 오전 강의가 끝나면 11시 45분이었고,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행정실로 출근을 했는데 날이 더워지면서 왔다갔다하기 번거로워졌다. 아침을 항상 든든하게 먹어서 점심은 가볍게 먹고 가는데 오가는 시간이 굉장히 아까웠다. 행정실 옆엔 넓은 로비가 있었는데, 정수기도 있고 테이블도 대여섯개있었다. 행정실이 있는 층엔 강의실도 없어서 평소에도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는터라 나는 도시락을 싸와서 거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창문환기도 잘되는 곳이라 도시락을 먹은 다음에도 냄새가 남지 않아 더 좋았다. 처음엔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사서 먹다가 이마저도 물려서 집에서 밥과 반찬 등을 싸왔다. 청소하는 이모님들께 미리 말씀드리니 '학생은 어차피 잘 치워줄테니 마음껏 먹어'라고 하면서 아침에 도시락을 싸서 먹는것이 참 기특하다고 하셨다.

11시 45분 수업이 끝나고 행정실 로비에 도착하면 딱 12시. 선생님들 식사하러 가시고 조용한 로비에 앉아 좋아하는 영상을 틀어놓거나 책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양치를 하고 다 긴 테이블에 누워 쪽잠을 10분쯤자면 선생님들이 오셨다. 도시락 싸오기 번거롭지 않냐면서 같이 밥먹으러 가자 하셨지만 부담스러워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이따금 맛있는거 먹으러 가니 내일은 도시락 싸오지 말라고 하시며 날 데리고 고기나 고급 이태리식당 등에 데려가주셨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처럼 도시락을 먹고 양치를 하고 나왔는데 처음보는 분이 행정실 문을 두드리며 난감해하겠다. 급히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행정실 인턴인데 무슨일로 오셨다고 물으니 실장님을 뵈러 왔는데 문이 닫혀있다고 하셨다. 한시에 약속을 잡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실장님께서 전화를 안받으신다고 했다. 식사시간은 한시까지라 그때 오실거라고 안내를 하고 다른 선생님께 전화해 상황을 말씀드렸다. 그분은 실장님과 통화를 하고나서 한숨돌리셨는지 로비 한켠에 앉으셨다.

시간이 20분쯤 남았고, 서로간에 멀뚱하게 있었는데, 문득 휴게실에 음료와 커피잔이 있다는게 생각났다. 커피한잔 하고 오셨냐 물으니 실장님과 한잔 하려고 바로 왔다고 해서 잠시 기다리시라고 한뒤 행정실 맞은편 휴게실에 가서 커피를 내갔다. 휴게실엔 교수님들 손님접대용으로 커피잔과 받침 등이 늘 구비되어있었는데 '이걸 언제 쓰냐'고 했던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손님은 커피 이야길 하길래 자판기에서 뽑아오겠거니 했나보다. 내가 예쁜 커피잔에 따끈한 커피를 내오며 '믹스 별로시면 블랙(그땐 아메리카노라는 말을 잘 안썼다)으로 드리겠습니다'하니 굉장히 놀라시며 뜻밖에 손님접대를 받았다고 좋아하셨다.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길 나누고 있는데 실장님과 선생님들이 오셨다. 손님은 '여기 학생 덕에 맛있는 커피 대접받고있었다'라면서 커피잔을 보여주셨다. 실장님은 고맙다고 하셨고, 다른 선생님들은 연신 '기특하고 똑똑하다' 칭찬해주셨다.

오후에 퇴근하려는데 권선생님께서 날 따로 부르시더니 '너는 정말 일머리가 있구나. 오늘 얼마나 기특하고 대단했는지 모른다' '앞으로 내가 입 댈것도 없겠다. 진짜 대단해' 평생들을 칭찬을 그날 다 들은것 같다. 그날 처음으로 '일머리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중에 이선생님께 일머리가 뭐냐고 여쭤보니 일머리는 타고나는거라면서 일을 잘할수는 있지만 일머리는 정말 감각과 센스, 통찰력 등등이 없으면 아무리 공부해도 얻지 못하는건데, 너는 이제 스무살 초반인데 이런 일머리가 있으니 정말 대단한거야 하면서 더욱 칭찬해주셨다.


뜻밖에 칭찬을 받아 얼떨떨하면서 '그냥 나 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싶었다. 다른 누구라도 나처럼 했을거라고 했더니, 이선생님은 자긴 절대 생각도 못했을거란다. 아니 애당초 보통 인턴들이었으면 자릴 피했거나 안내만 하고 말았을것이라고 했다. 그후 선생님들과 실장님께서 행사가 있으면 미리 나에게 혹시 도와줄수 있겠냐, 이걸 어떻게 정리해보면 좋겠냐고 물으시고, 일이 마치면 두둑한 일당은 물론이거니와 행사하고 남은 각종 비품과 음료, 간식에 식사비도 따로 챙겨주셨다.

4개월간 행정인턴십이 끝날무렵, 실장님께서 혹시 다음학기에도 행정인턴십을 할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할 수 있으면 계속 하고싶은데, 이번에 해서 다음엔 어려울것같다고 했다. 선생님과 실장님께서 내가 계속 있었음 하는데, 나만 괜찮다고 하면 쭉 쓰고싶은데 방법이 없는지 진즉 담당자에게 문의를 하셨단다. 담당자는 가능은한데 그렇게 연장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턴십하는 학생이 얼마나 잘하길래 계속 같이했음 하냐고 물으셨단다. 실장님은 너무 잘하는 학생이라 학생이 원하면 우린 계속 하고싶은데 할수있냐고 물었고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면서 나만 괜찮다면 함께하자고 했다. 나는 이게 뭔 일이냐! 무척 기뻤다. 1년 6개월을 일하고 졸업을 했다. 명절때는 항상 차비하라고 5만원씩 주셨고, 매주 금요일이면 '오늘은 집에 가냐'고 물으시며 '어서 가보라'하고 한시간씩 일찍 마쳐주신적도 많았다. 감사한 마음에 보답하는건 내 일을 잘하는것이라는 생각에 내 업무에 충실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리 행사가 있으면 자잘한 일을 미리 해두면서 내가 할수있는 최선을 다했다.

권선생님과 이선생님, 최선생님과는 아직까지 인연을 이어오고있는데 여전히 날 기특하고 잘하는 예쁜막내라고 아껴주신다. 나도 그분들의 기억 속 그 인턴으로 잘 살려고 오늘도 노력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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