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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다 Jul 25. 2023

나홀로 도라산역에서

13  나는 엄청난 여행광이었다. 그것도 혼자 훌쩍 짧게는 당일, 길게는 일주일 넘게 있다 오곤 했다. 당시엔 운전도 하지 않아서 기차며 버스, 웬만하면 걸어서 잘도 다녔다. 그때는 국내 이곳저곳을 유랑했다.


경주나 부산, 대구 정도는 무궁화호 첫차를 타고 가서 막차로 돌아왔고, 전라도나 충청도, 강원도 등지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잡거나 야간버스를 타며 숙박비를 아꼈다. 누군가는 “ 흉흉한 세상에 여자가 혼자?”라고 말리거나 이해 못했지만,  170cm 엔간한 성인 남자들 못지않은 든든한 체구를 가졌고, 목소리도 장대비 같은지라 치한은커녕  흔한 “낯선 여행지에서 로맨스 쥐뿔 없었다. 오히려 앳된 학생이 혼자 다니는  대견하다고 식당이며 숙박업소 사장님들이 굉장히   주셨다. 원체 내가 넉살이 좋기도 했다. 처음 식당에 가서 혼자 주문을 하고 앉아있으면, 으레 식당에 있는 손님이나 사장님들이 혼자  낯선 여행자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낸다.


나는 그걸 피하지 않고 먼저 “저는 울산에서 왔고 휴일을 맞아서 혼자 여행을 왔어요라고 한다. 그러면 열이면 , 빗장이 풀린  폭풍 질문이 쏟아진다.  혼자 다니냐, 무섭지 않냐,  살이냐, 어디를 다녀왔고 앞으로 어딜  거냐 . 사람들은 달라도 물어보는 질문은  비슷했다. 걱정과 대견함의 칭찬도 아낌없이 받았다. 당시 오지여행가 한비야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던 터라 나는 <국내판 한비야>라는 멋진 별명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멀미가 심해 기차여행을 선호했는데, ‘내일로티켓을 구매해 기차여행을 다니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것은 7 동안 무제한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기차를 자유석으로   있는 티켓인데, 합리적인 가격과  역마다 다양하고 푸짐한 혜택이 있어 인기가 많았다. 보통은 학생들이 신청하는지라 무료 숙박업소나 가장 저렴한 식당 등을 이용하는데, 나는 이른 나이에 취업을  덕분에 비교적 여유 있게 다녀올  있었다. 여유라고 해봤자 가격보단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다양하게  먹는다던가, 조금  시설이 좋고 가격이 있는 숙소에서 생활하는 정도였지만.

   번의 여행을 다녀왔는데, 보통 일정은  비슷했다. 울산에서 출발해 부산, 하동, 곡성, 순천, 전주를 거쳐 서울에 숙소를 잡고 강원도나 충청도를 다녀온  집으로 귀가했다.  비슷한 일정, 코스라 의무적으로 다니길  차례,  번은 TV에서 <도라산역> 나왔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남한 최북단 기차역, 바로 다음 역이 북한, 당시에   없던 대단한 규모와 흡사 공항 같던 시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더군다나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과 비무장지대마을, 3땅굴 등도   있는 투어 버스도 있다는 말에 “다음 여행엔  저곳을 가봐야지하고 별렀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문산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문산역에 사람이라곤 나와 역무원들뿐이었다. 역무원들은 덜렁 혼자 있는 내가 신기했는지 힐끔댔고, 나는 나대로 고민에 빠졌다. 나 하나 때문에 기차를 운행하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도라산역을 가지 못하면 또 올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걱정 반, 포기 반으로 역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혹시 저 하나 때문에 기차 운행을 하는 것이냐고. 역무원이 막 웃더니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냐고 무척이나 기특해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손님이 한 명도 없더라고 임진강역에서 타는 사람을 위해 시간에 맞춰 운행을 해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임진강역에 가면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그 근처는 무조건 버스투어를 해야 하니 그걸 타고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했다. 그제야 안심하고 기차에 올랐다.

 10분 남짓 걸려 임진강역에 도착했는데, 당초 문산역 역무원이 말한 것과는 달리 평화누리공원이 휑했다. 몇 없는 관광객들은 본인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를 타고 다시 갔다. 버스표를 사고 역으로 돌아왔다. 역시나 여기서 도라산역까진 나 혼자 기차를 탔다.

 다른 것은 이곳부턴 군인들이 함께 한다는 것. 어쩌다 보니 나 혼자 세 명의 보디가드를 거느리고 단독으로 단체버스를 타고 설명을 듣는 ‘호화여행’이 되었다. 궁색한 여행객에게 이게 뭔 호사인가 했다. 문산역 역무원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내가 탄 기차도, 곧 타야 할 버스도 사람이 없더라도 어차피 운행 해야 하니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부담은커녕 호사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군인 세 명의 호위를 받으며 도라산역에 입성했다. 간단하게 그곳의 안내원에게 역의 설명과 의의 등을 들은 후 버스에 올랐다. 무려 40인승 버스에 나와 군인, 안내원 달랑 타고 갔다. 통상 코스는 도라산역을 출발해 DMZ 전시관과 제3땅굴, 전망대를 둘러본 후 통일촌에서 식사를하고 다시 도라산역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안내원은 지금은 여행 비수기라 관광객이 많지 않으니 통일촌은 생략하고 바로 도라산역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혼자 식사까지 하는게 부담스럽던 차에 부담을 덜었다. 버스가 출발했고, 안내원은 “여긴 사진촬영이 엄중히 금지되어 있다, 전시관과 전망대만 가능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DMZ 전시관에서도 50석 넘는 좌석에 나 홀로 달랑 앉아 관련 영상을 보고 돌아다녔다. 제3땅굴과 전망대는 그 가치가 무색할 정도로 너무 관광지화 되어있어서 의무적으로 한 바퀴 돌고 바로 차로 돌아왔다.

 원래 관광은 3시간 이상 소요되지만, 나는 혼자 둘러보기도 했고 통일촌을 다녀오지 않아서 도라산역에 다시 오니 12시 30분 정도였다. 돌아가는 기차는 2시 30분이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도 당장 없고, 택시는 더더욱 생각도 못한지라 꼼짝없이 두 시간 넘게 도라산역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이렇게 된 거 언제 또 오겠냐 싶어서 도라산역을 이곳저곳 둘러봤다.

 과연 도라산역은 TV에서 본 것보다 더 웅장하고 세련된 맛이 있었다. 공항을 뜯어온 듯한 수속절차 시설이 언제고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갖춰있었다. 다만 시설에 비해 당시 도라산역엔 변변한 식당도, 역사 내에 다른 볼거리도 없었다. 큰 역사에 비해 사람이 없어서더욱 썰렁했다.

 한구석에 작은 매점이 있어 그곳에서 컵라면 하나를 사서 먹었다. 매점주인이 “그것만 먹으면 맛이 없지하고 냉장고 안에서 김치와 , 숟가락을 주셨다. 들어올 때부터 너무 궁금했다면서 이것저것 물으시면서 연신 “아이고 대단하다”, “어머 그래도 어쩜 이런 용기가 생겼어?”라고 칭찬의 추임새를 아끼지 않으셨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그곳에서 파는 북한우표와 엽서세트, 여기서만   있다는 산머루주를 샀다. 밥을 먹고 매점주인과 이야길 나눠도  시간이 넘게 남았다.

 이젠 진짜 할 것도 없고, 잠도 와서 기대서 잘 곳을 찾아다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날 불렀다. 근처 주민이신가 했더니 도라산역 안내소를 지키는 안내원이셨다. 3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그 분은 말끔한 옷에 멋들어진 모자를 쓰고 계셨는데, 사실 아까부터 죽 지켜보며 이야길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나에게 “왜 이곳까지 혼자 왔냐”고 했고, 나는 “도라산역을 tv에서 봤는데, 너무나 멋져서 보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주 흡족해 하시며 도라산역명의 유래부터 이곳 근처의 명소, 내가 아까 다녀온 관광지들의 다양한 이야길 해주셨다. 어찌나 이야길 맛깔나게 하시는지 맞장구치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르신은 말맛도 있었지만 배경지식이 대단히 풍부하셔서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분이 하면 대단히 멋스러워졌다. 내가 “그래도 역사적으로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곳인데, 너무 관광지화 되어 가볍게 소비되는 게 안타깝다”고 했더니 무릎을 탁 치시며 공감해 주셨다.

 다만 그 분은 “가볍게 소비되더라도 한국 사람이라면 역사의 깊이와 한을 알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아! 나의 우려는 한낱 여행객의 기우였구나 싶었다. 안도감과 함께, 이 분이 여기서 안내를 해주는 한 도라산역과 이 일대가 가진 가치가 훼손되지 않겠다는 다소 장황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윽고 기차 시간이 다가오자 군인들이 다시  에워쌌다. 아쉬운 마음에 안내원 어르신과 사진을 찍고 “ 다시 올게요라고 하니 “ 언제 갈지 모르니 빠른 시일에 오라라는 농을 던지셨다. 오랜만에 본인의 이야길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기뻤다며, 앞으로  해도 아주   거라고, 인생사 어찌 될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혼자서 우직하게 다니면 나처럼 당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고, 덕분에 누군가는 빛날 거라는 덕담도 아끼지 않으셨다.

 이후 도라산역에 갈 일이 더 생기지 않았고, 생업에 치여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주 짧은 여행의 한 자락이었지만, 그날 나 혼자 감행한 무모한 도전과 누구도 할 수 없는 독특한 추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요즘 나이가 많다고, 경력단절된 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몇 차례 일자리에 탈락되다 보니 내 자신이 참 초라하고 뭣도 없구나 싶다가도 그날 어르신이 해 준 “누군가는 당신 덕분에 빛날거다”라는 말에 힘을 얻는다. 오늘도 나는 그 말 한마디로 살고 있다. 올해는 꼭, 어르신을 뵈러 가봐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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