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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다 Aug 17. 2023

온기를 받았다



나는 <온기우편함> 후원자다.


온기우편함은 익명의 사연자(온기)가 자신의 고민을 보내면 또 다른 익명의 우체부(온기 우체부)가 답장을 준다.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실사판 같은 이 활동은 해를 거듭할수록 많은 이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고 있다.

나는 몇년 전 유퀴즈 온 더 블록을 통해 온기우편함을 알게 되었고, 좋은 취지의 활동에 응원을 하고자 매달 5천원씩 후원하고 있다.

당시엔 서울과 경기 일부만 운영했는데, 지금은 온라인으로도 보낼 수 있을 뿐더러, 몇몇 지역에서도 만날 수 있다.


1년이 훌쩍 넘도록 매달 후원금을 보내다가, 어느날 문득 '나도 여기 편지를 보내볼까?'싶었다.

때마침 우리 지역에 온기우편함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가봤다. 귀여운 노란색 우편함 옆엔 편지지와 볼펜, 리플렛이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편지지를 펼쳤다. 그런데 막상 쓰려니 "내 고민이 뭐여?" 한참을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그래도 편지를 쓰는 건데, 뭔가 '그럴듯한 고민'을 써야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의 고민은 굉장히 신변잡기였고, 누군가에게 터놓기 남사스러운건 아니지만 '뭘 그런걸 고민이라고' 싶은 소소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기 짝이 없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그날 그냥 편지지만 들고 집으로 왔다.

며칠동안 그 편지지는 내 가방 속에 들어있었다. 거의 잊고 살았다.


어느날,우겨넣듯이 하루를 보내고 모두 잠든 새벽. 너무 피곤해서 잠도 오지 않던 그 날.

나는 가방 속 노란 편지지가 문득 떠올랐다. 하소연할 배우자도, 투정부릴 만한 친구도 없는 외롭고 쓸쓸한 내 삶의 위안을 줄 것 같았다.

편지지는 다행히 구김 없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보니 "이 편지지에 뭐라도 쓰면 위로 받을 것 같다"는 막연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펜을 잡고 한참을 써내려갔다. 몇 번을 멈추다 쓴 편지엔 비단 오늘 뿐 아니라 그 전부터 쌓였던 나의 삶이 켜켜히 담겨있었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눈물보단 안도의 미소가 났다. 이제 난 다 털어냈다. 두 다리 뻗고 잘 잤다.


그런데 편지를 보낸 다음날부터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편지를 받은 누군가가 내 편지의 답장을 쓰려면 얼마나 힘들고 고될까? 내가 너무 배설하듯이 내 찌꺼기를 다 털어낸거 아닌가? 아무도 모른다지만 언젠가 누군가가 알지 않을까? 이거 남사스럽네? 편지가 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겠다. 지금이라도 온기우편함에 연락을 해서 내 편지에 답을 하지 말고 그냥 버려달라고 할까?

답장을 해 줄 누군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왜 이런 걸 써서 보냈지 라는 엉뚱한 당당함에 부끄러웠다. 결국 온기우편함에 연락할 용기도 없어서 그냥 뒀다.

그렇게 한참을 잊고 살다가 어제 우편함에 노란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정기적으로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글인줄 알았는데 받는 사람이 "온기님"이었다. 귀엽고 정감있는 손글씨. 나는 그 편지를 소중히 넣었다가 그날 밤에 폈다.

귀엽고 앙증맞은 손글씨의 온기우체부는 나보다 한참 어린 것 같았다. 나에게 "정말 대단하세요"라며 추켜세워주더니 이내 본인의 경험에 빗댄 일화를 소개해줬다.

글자 한 개도 꼭꼭 눌러쓴 그 편지는 이름난 멘토들의 그럴듯한 말보다 더 큰 위안이 되었다. 나의 고민을 이렇게까지 같이 공감하고 이해하려 애쓰던 사람이 있었나?

한 명도 없었다. 나조차 내 고민에 확신이 없고 부끄러웠으니까.


온기우체부의 편지 한 통 덕에 내일부터 내 하루는 좀 남달라질거 같다. 우선 "내 고민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적어도 내 고민을 허투로 들어주지 않았다는것. 이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이름모를 온기우체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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