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시티> 연작 소설
한 뼘 벌어진 어둠.
안수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꿈’이었다. 카로라 섬에 온 뒤로, 안수는 매일 같은 꿈을 꾸었다. 해변 산책을 하고, 시장에서 과일을 한아름 사고, 어스름이 내린 침대에서 일어났다. 과일은 바나나, 용과, 리치, 그리고 털이 숭숭난, 건들면 녹아버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로 변했다. 이불도 양털 이불이었다가 모시 이불이었다가 코코넛 줄기로 짠 그물로 변했다. 순서는 매번 뒤섞였고 디테일도 달라졌지만 마지막은 항상 같았다. 여정 끝에 집으로 돌아왔고, 문이 열려 있었다. 딱 한 뼘.
안수는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았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을 서성였다. 그럴 수밖에. 꿈에선 문을 여는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손을 자르거나 배에 구멍을 내었다. 가장 기분이 더러운 건 머리가 잘리는 것이었다. 안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새벽일 때도 있었고, 느즈막한 점심일 때도 있었고, 이른 저녁일 때도 있었다. 안수는 땀으로 척척이 젖은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던졌다. 마른 수건으로 땀을 대충 닦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변명했다.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해. 분노했다. 다 내 잘못이야. 체념했다. 안수는 이불 속으로 파고 들며 마른 눈을 감았다. 만약 이 꿈이 현실이 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일지 모른다.
안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잡아당기지 못했다. 미련은 진작 버렸을 터였다. 섣부른 결정 하지 마. 정말 죽고 싶은 거야? 아니잖아. 경찰에 신고부터 해. 안수의 목소리로 누군가 속삭였다. 카로라 섬 경찰은 친절하고 섬도 크지 않으니 도착하는데 3분도 걸리지 않는다. 안수도 아직 안수로 불리던 시절이었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안수는 믿음이 있었다. ‘세계’라는 것이 아무리 힘 있는 자들의 논리에 놀아난다고 해도 그것은 영화나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며,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안전망이 엄밀히 존재한다는 굳은 믿음이. 하지만 안수는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진실을 몰랐던 무지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안수는 문에 이마를 콩콩 들이받았다.
*
“작작 마셔. 그러다 위에 빵구 나.”
애덤이 안수에게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안수는 애덤의 손을 피해 루나 드링크 주둥이에 입을 갖다대었다.
“와, 어떻게 멀쩡하지. 난 한 모금만 마셔도 가슴 뛰어서 한숨도 못 자는데.”
“난 화장실 때문에 못 마셔. 한 캔은 버티는데 두 캔부턴 종일 변기 붙잡고 살아야 돼. 안수야, 배는 안 아파?”
옆에서 얘기를 듣던 무하마드가 거들었다.
“배가 왜 아파요.”
안수는 고새 새로운 루나 드링크 캔을 깠다.
“어떻게 하면 루나 드링크를 잘 마실 수 있어?”
“애덤, 너는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을 하냐.”
“선배는 야간 괜찮아요? 어후, 난 힘들어요. 힘들어. 저게 잠 깨는데 효과 직빵인데, 화장실도 직빵이라 못 마신다니까요. 진짜 비법 있으면 알려줘.”
안수는 웃고 말았다. 술이라면 모를까 에너지 드링크를 잘 마실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 없다.
“너네 조상 중에 루나리안 있는 거 아니야? 요새 침 한 방울이면 핏줄 찾기 다 된대.”
애덤의 바보 같은 질문에 안수는 또다시 웃고 말았는데, 증조부의 생년보다 루나시티 설립 시기가 늦기 때문이었다. 증조부는 머리 위로 수소폭탄이 떨어져도 절대 우주선을 타지 않겠다는 분이었다. 루나시티는 실패한 정책에서 시민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꾸며낸 지구연합의 획책의 불과하다며 절대 우주선에 타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증손자는 그 허상에 빌붙어 겨우 밥을 빌어먹고 있다.
“다들 비번일 때 어디 가?”
무하마드가 빈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선배, 이번 주 비번이에요? 다른 사람은 엄청 빨리 돌아오는 거 같네. 나는 언제지.”
스케줄을 확인한 애덤은 자기 순번이 돌아오려면 한참 남았는지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갈 데가 타운 말고 더 있어요?”
“타운 말고. 이제 거기서 할 것도 없어.”
들으나 마나한 안수의 대답에 무하마드는 맥빠진 표정을 지었다.
“왜 할 게 없어요. 사람 구경도 하고 쇼핑도 좀 하고.”
“비이켄 타운에서 사람 구경할 곳이 있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듣네. 베드타운이라서 뭐 없잖아. 쇼핑도 기껏해야 대형마트 하나 있고.”
“선배, 안수 쟤는 루나 드링크만 사니까 괜찮죠. 사람도 신혼 부부랑 아기들 말고 더 있어요? 나는 아기들이 이렇게 많은 곳은 처음 봐요.”
무하마드는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애들도 사람은 사람이지. 참, 이런데에 연구소를 짓는 건 뭐람.”
“먼저 땅 산 놈이 짓겠다는 데 뭐, 어떻게 해요. 설마 선배, 달토끼들 걱정해요?”
“아니, 뭐. 걱정이라기보다는 아기들이 많으니까 위험하잖아. 루나리안이라고 해서 생긴 게 딴판일 줄 알았는데 우리랑 똑같더만.”
“우리 무하마드 선배, 정신 교육 다시 받으셔야겠네. 달토끼랑 우리랑 어떻게 같아요. 겉모습이야 같겠죠. 하지만 요, 요 속이 다르죠.”
애덤이 손가락으로 귓바퀴 뒤를 콕콕 찔렀다.
“꼬우면 지네들이 십 달러 주고 땅을 샀어야지. 안 그래요?”
“억지 아니냐. 루나시티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선배는 누구 편이에요. 비이켄 연구소 누구 소윤지 알고나 하는 말이에요?”
애덤은 천장 구석에 빨간 불을 깜빡이는 카메라 렌즈를 슬쩍 보았다.
“내가 왜 몰라. 트러스트 사. 지구연합. 알아. 다.”
“아는 사람이 그래요? 저희는 성실하게 그냥 맡은 일 하고 돈만 받으면 돼요. 안수, 내 말 맞지?”
안수는 고개를 주억였다.
“됐고. 그래서 비이켄 타운 말고 너네들은 어디 가는데.”
“센트럴 가죠.”
“너네는 체력도 좋다. 새벽 근무 서고 거기까지 어떻게 가냐. 오가는데만 두 시간 넘게 걸리잖아.”
“그래도 애들 많고 볼 것도 없는 여기보단 낫죠. 선배도 한 번 가봐요. 확실히 다를 걸요?”
무하마드가 쓰읍, 하고 침과 숨을 동시에 삼켰다.
“애덤 말 믿고 나도 센트럴 가볼까. 애덤, 센트럴에 가볼 만한 데 있어?”
“제가 또 리스트를 뽑아놨죠.”
“너 일은 안하고 이런 거만 하냐? 성실하게 일한다며.”
“에이, 선배. 섭섭하게. 성실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놀고. 그래서 이거 안 볼 거예요?”
애덤은 디바이스를 흔들어 보였다. 무하마드는 헛기침을 하고는 애덤 목에 팔을 걸었다. 안수는 루나 드링크를 마시며 멀어지는 동료의 뒷모습을 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