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5)

<루나시티> 연작소설

by 송건자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기서 나가고 싶어. 지구든 루나시티든 히노데 정거장이든 어디든 좋아.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탈출 포트 같은 거 있을까?”


리히터는 목 끝까지 참아왔던 말을 쏟아냈다. 또다시 점선이 애나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다섯 바퀴 돌았을 즘 애나의 이목구비가 돌아왔다.


“탈출 포트는 지난달 사용 이후 보충되지 않았어요.”


“탈출 포트가 하나도 없어? 그건 우주 안전법 위반이야.”


“5일 뒤에 보충 계획이 잡혀 있어요.”


“지금 정거장에 한 대도 없어?”


“세 대가 있지만 정상 기능을 기대하기 어려워요.”


“탈출 포트를 사용할 만한 사고가 있었어?”


“11월 13일. 원인 불명의 폭발로 긴급 대피 사고가 있었어요.”


“서기관님, 알고 있었어요?”


하연은 한숨으로 대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탈출 포트를 사용할 만한 사고라면 대대적인 뉴스가 나왔을 것이었다. 그걸 왜 몰랐을까. 못 본 걸지도 모르겠다. 한 달 전이면 관계 협의 준비로 정신이 없던 때였다. 하연은 고개를 저었고, 리히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책망한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하연의 잘못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탈출 방법 리스트에서 탈출 포트를 지웠다.


“애나, 다음 여객선은 언제 와?”


“사흘 뒤 13:10 LST, 루나시티 발 휴스턴 착 FLTE-389편이 입항 예정이에요.”


“삼일이나 여기 더? 나는 그렇게는 못해.”


리히터는 심사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애나, 오늘 도착하는 화물선은 있어?”


초록색 점선이 애나 얼굴을 가로질렀다. 한 바퀴를 채 돌기 전에 애나는 동그란 눈을 꿈뻑였다.


“금일 화물선 입항은 없어요.”


“인부들 출근하지 않아? 아니, 정거장에서 대기하는 인부들도 있잖아. 정거장이 넓으면 몰라. 이렇게 좁은 정거장에 이틀이나 갇혀 지내는 건 기본권 침해야.”


하연은 애써 괜찮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정거장 내 체류하는 인부들은 없어요.”


“저렇게 화물이 쌓여 있는데?”


하연은 벤치 바로 옆까지 쌓아 올린 철제 상자를 가리켰다.


“이틀 전 마친 작업이에요.”


“누가 가져가면 어쩌려고.”


“미리내 정거장 운영 방침 변경을 알려 드릴게요. 미리내 정거장 이용을 점차 줄이기로 결정했어요.”


“언제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어.”


“11월 1일. 하콘라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어요.”


하연은 이마를 짚었다. 미리내 정거장이 가진 역사적 가치 때문에 남겨둘 거라는 건 하연의 착각이었다. 하콘라디 대통령은 물건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냉정하게 저울질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연은 엄지와 검지로 눈두덩을 눌렀다. 두 마디는 족히 들어갔다.


“애나, 다음 화물선은 언제 와?”


“내일 01:45 LST, 부산 발 루나시티 착 화물선 FETL-142편이 입항 예정이에요.”


하연은 통신 디바이스를 건드렸다. 지금으로부터 20시간 뒤였다. 하연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벤치로 걸

어갔다.


“애나, 모드 전환하지 말고 기다려.”


리히터는 하연의 뒤를 쫓았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하연은 맥 빠진 얼굴로 리히터를 보았다. 리히터도 답답할 것이다. 우주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 오랫동안 무중력 상태에 놓인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일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미중력(微重力)이지만 땅거북에게는 그게 그거다.


“서기관님! 어떻게 하실 거냐구요!”


리히터는 빚쟁이처럼 하연을 독촉했다.


몰라요. 나도 모른다고요. 정거장을 부수든 애나를 협박하든 알아서 하라구요. 하연은 리히터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우주에서는 서로 도와야 한다.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우주에선 서로 도와야 한다. 루나시티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하연은 루나시티의 얼굴이었다. 여기서 약한 꼴을 보이면 리히터가 돌아갔을 때 달토끼들은 이러쿵저러쿵 할 게 틀림없었다. 하연은 무너진 허리를 바로 세우며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기다려야죠. 무리해서 탈출 포트로 지구나 다른 정거장에 가는 것보다는 화물선을 기다리는 게 안전해요. 화물선이라도 사람 두 명은 탈 수 있겠죠. 한 자리밖에 없으면 차관님이 타세요.”


“하지만 다음 화물선은 루나시티로 가잖아요.”


“사흘 뒤에 오는 여객선보다 루나시티에서라도 보호받고 지구로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아요?”

리히터는 턱에 손을 가져갔다. 간단한 저울질도 어려운 것 같았다.


“그래도 서기관님을 두고 어떻게 저 혼자 갑니까.”


“괜찮아요. 멀미약도 드시는 거 같은데. 무리 마세요. 스노그의 문제가 있으시잖아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리히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담당자에 대해 공부하는 건 테이블에 오르는 사람의 기본 소양이죠. 제가 차관님을 가르칠 입장은 아니지만요. 뭐, 저야 이렇다 할 정보가 있지도 않고요. 원래 제 역할을 맡아야 할 사람이 격리되는 바람에 제가 나온 거예요. 차관님도 ‘2등’ 서기관이랑 협상 테이블에 앉을 줄은 모르셨잖아요.”


2등 서기관과 협상하게 되어 당황스럽긴 했다. 라리슨 장관이 아니라서 힘을 뺀 줄 알았다.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을 줄이야. 리히터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리히터 차관님.”


하연은 전원이 부족한 애나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까 이야기했던 거 아직도 유효한 거죠?”


하연은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리히터를 보았다.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이익일까? 리히터는 하연에게서 최대한 멀리 눈동자를 돌렸다.


어차피 테이블은 엎어졌다. 협상이란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새로 판을 짠다고 해서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다.


“자원 독점권이랑 실험 통제권, 말씀이죠?”


하연은 아주 깊게 정성을 들여서 고개를 주억였다.


리히터는 턱을 당기며 숨을 끓였다. 빈약한 볼살이 볼품없는 턱살을 한 겹 더 쌓았다.


리히터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라리슨 장관이 알려준 첫 번째 협상 기술이다. 자원 독점권과 실험 통제권을 루나시티에게 넘겼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해야 할까. 리히터는 저울을 세웠다.


하연은 리히터의 마른 입술만 바라보았다. 아직 루나시티에서 지구연합에 내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리히터가 망설이는 것도 이해했다. 다만 이미 정해진 사항에 대해서는 확정을 지어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하연은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이 얻어낸 두 가지 성과를 루나시티에 가져가야 했다. 만약 리히터가 결정을 번복한다면 그러지 못하도록 밀어붙어야 한다. 구두 협의는 끝났고 서명을 하기 직전에 감염자들이 들이닥쳐 서명을 받을 시간이 없었다. 이건 사실이다. 협의장에 음성 기록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서명은 당장 하연의 디바이스에 해도 괜찮았다. 하연의 디바이스는 루나시티 정부의 공인을 받은 대외용 기기였다.


길어지는 고민에도 하연을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윽고 리히터가 입을 열었다.


“저는 저희가 나눴던 구두 합의까지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말을 뒤집고 싶지 않아요. 지구연합은 이번 관계 협의를 마지막으로 전부 정리하고 싶어 합니다. 전부터 그러고 싶어 했어요. 이건 제 개인 의견이나 바람이 아닙니다. 지구연합 나아가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뜻으로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하연은 들뜨는 마음을 간신히 붙잡았다. 하연은 새어 나오는 흥분을 가다듬으며 상의 포켓에 손을 가져갔다. 리히터는 오른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좋습니다. 다만……”


리히터는 숨을 골랐다. 하연은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요구를 하나 들어주신다면 앞선 구두 합의에 흔쾌히 서명하겠습니다.”


하연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연은 리히터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들으면 불쾌하고 리히터를 인간적으로

싫어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루나시티의 대표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만큼 귀를 막을 수 없었다.


“뭐죠?”


리히터는 침을 꼴깍 삼켰다. 최대한 차분하고 담담하게 말해야 한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고, 새는 하늘을 날고, 인간은 공기를 마시는 일처럼 요구는 정말 자연스럽고 아주 당연하게 말해야 한다. 들었을 때 한치의 의문도 들지 않도록. 라리슨 장관이 알려준 두 번째 협상 기술이다.


“전염병이 루나시티에서 시작되었다고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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