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의 일생

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by 송건자
‘척의 일생’ 포스터

2025.12.20.


일전에도 말했지만 스티븐 킹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스티븐 킹의 모든 작품을 읽진 않았다. 단편소설을 조금 읽은 정도인데 (장편은 너무 장편이라 손대기가 겁난다. 모두 읽고 싶은데..) 거진 다 재밌게 읽었다. 연세도 연세인데 어쩜 정력적으로 쓸 수 있는지. 하루키와 킹 옹은 정말 존경스럽다. 영화로 돌아와서 ‘척의 일생’은 원작이 스티븐 킹인 점도 있지만 톰 히들스턴이 주연으로 나와서도 관심이 갔다. 감독은 몰라도 배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내게 톰 히들스턴이 그렇다. 기대감이 높아지는 와중에 프리미엄 상영을 보면 황석희 번역가의 대사집도 준다니 미리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영화가 시작했을 때 당황했다. ‘Act 3’—‘3장’이 바로 나왔기 때문이다. 역순으로 갈 거라고 예상을 했지만 첫 시작부터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흥미를 높이는데 성공했다.

첫 번째 나온 ‘3장’은 세계 종말을 다룬다. 우울한 분위기에서 삶의 희망을 담담하게 다루는 게 정말 마음에 들었다.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인물간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감정이 잔뜩 실린 대화가 아니라 더욱 그렇다. 3장은 미스터리로 채워져 있다. ‘고마워요, 척!’ 이라는 문구가 영문도 모른 채 계속 나온다. 옥외 광고, TV 광고, 라디오 광고. 등장인물들도 누구도 모르고 관객들도 모른다. ‘척의 일생’인데 척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거며 대체 이 사람이 누군데! 3장은 그렇게 의문만 부풀리다가 우주 폭발로 끝을 맞이한다.

다음은 ‘2장’. 기다리던 ‘척’이 등장한다. 회계사 척은 컨퍼런스 참가 때문에 동네를 떠나 낯선 지방에서 지내고 있다. 70명의 회계사와 같이 행동하고 싶지 않은 척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던 중 드럼 버스킹을 지나친다. 그리고 갑자기 드럼 비트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열정적인 춤을 추던 그는 구경꾼 중에서 한 여자(1년 넘게 사귀던 남자친구와 방금 이별 통보를 당했다)에게 춤을 권하고 그녀와 함께 멋진 춤을 춘다. 그들은 멋진 버스킹을 마치고 짧은 대화를 나누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신경 쓰이는 나레이션. 척은 8개월 후에 이 광경을 기억하지 못한다, 는 불길한 이야기.

마지막 ‘1장’. 척의 유년 시절을 다룬다. 척이 어떻게 춤을 추게 되었고—사랑하게 되었고, 회계사가 되었고, 또 버스킹에서 춤을 추다 멈추었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이 스티븐 킹이라는 걸 새삼 떠올렸다.


영화를 역순으로 구성한 건 탁월한 선택이다. 원작에서도 동일하게 구성했는지 모르겠지만 사건의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그것이 도출된 과정과 원인을 보여주는 구조라서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탐정처럼 앞서 나온 대사와 인물, 행동의 원인을 밝히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척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곱씹으니 뭉클했다.

3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1장과 2장에서 나온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한다. 이는 3장이 ‘척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척의 세계’란 말 그대로 ‘척’ 안에 있는, 척이 만든 우주를 말한다. 영화는 인간의 경이로움을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곤 한다.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나는 광활한 우주에서 먼지만도 못한 존재이며 나 따위 사라져도 이 세상이 무너질 걱정이 없다. 그만큼 나란 존재는 작디작은 미물보다 못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어떻게 다가올까? 3장—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척의 세계에 살던 사람들은 세계의 종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루 아침에 인터넷이 끊기고 싱크홀이 생기고 꿀벌이 사라지고 식량지대가 사라진다. 종말이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에 마티는 사랑하는 사람—전부인 펠리시아를 만나러 수십 킬로(아마?)를 걷는다. 우주마저 소멸하는 순간에 마티는 펠리시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넨다. ‘I Love You’. 이 짧은 말도 다 전하지 못하고 종말이 찾아온다. 생명을 가졌다면 겪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즉, 한 인간의 죽음—3장에서 ‘대체 척이 누군데!’ 라며 어처구니 없어 하는 그 ‘척’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한 우주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잇는 게 1장과 2장이다. 특히 1장이 중요하다. 1장은 스티븐 킹을 원작으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죽는 순간을 알 수 있는 다락방’이 나온다. 그곳에서 17살의 척은 자신의 미래를 본다. 뇌종양으로 머리가 다 빠지고 잔뜩 야윈 볼품없는 남자의 죽음을. 영화의 결말이자 척이 어떤 태도로 삶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이다.

척의 할아버지는 죽음을 기다리는 게 너무 괴롭다고 한다. 언제 그 순간이 올지 겁이 난다고. 그래서 척에게 다락방에 가지 말라고 했다. 죽음을 알면 그 순간을 무서워 하며 기다리게 되니 현실에 집중할 수 없다. 하지만 척은 달랐다. 언제 그 순간이 오든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내겠다고 다짐한다. 어쩌면 척이 드럼 버스킹에서 춤을 춘 이유가 그것일지 모르겠다. 왜 춤을 췄는지 스스로도 모르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던 것이다.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척이 춤을 사랑하게 된 이유—할머니의 죽음과 은하수를 품었던 댄스 파티의 밤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는 고루한 회계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가슴 속엔 춤을 사랑하는 어린 척이 있다. 드럼을 두드리는 드럼 스틱이 할머니가 냄비를 두드리는 나무 수저로 보이는 순간 그는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 춤을 추다가 머리가 아팠을 때 그는 알았을 것이다. 정확히 8개월 후에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적어도 멀지 않은 미래에 자신이 기다리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걸. 그러기에 춤을 끝까지 췄다. 마지막 무대에 선 프로 댄서처럼.


영화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앞서 말했듯 죽음은 누구나 겪는다. 빠르건 늦건 반드시 겪는다. 척의 부모가 빙판길에 교통사고로 죽고 엄마 뱃속에 있던 여동생은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할머니는 식빵을 집다가 선반에 깔려 죽고 할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죽는다. 해리슨(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은 목을 메고 죽는다. 척은 뇌종양으로 죽는다. 제각기 다르지만 같은 결과에 닿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이들의 삶이 모두 무가치하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어떤 환희와 낙담을 겪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경이로운 삶을 살았음은 틀림없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 받아 마땅하다.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죽음일까? 어떻게 죽어야 좋은 삶일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그럴듯한 답을 내자면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은 당장이 아니라 미래에 나타난다. 수 개월, 수 년, 수십 년 쌓인 결과는 하나의 형태가 되고 그것이 ‘나’이다. 그렇기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로또 번호를 가르쳐 줘도 ‘그’는 ‘나’가 아니다. ‘그’는 ‘그’이고 ‘나’는 ‘나’이다.


+ 톰 히들스턴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진 않는다. 그렇지만 곱씹을수록 척의 열정적인 몸짓과 표정이 생각난다.

+ ‘닥터 슬립’ 이후로 킹 옹의 원작을 잘 다룬 감독이 또 나타났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감독이었다. 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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