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2025.12.22.
심은경 배우가 포스터 전면에 나와서 한국 영화인 줄 알았다. 또 심은경 배우가 최근 일본을 주로 활동하기 때문에 독립 영화인 줄 알았다. 포스터만 보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얀 눈밭에 홀로 서있는 사연 있는 여자. 그런데 알고 보니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였다.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으로 알게 된 감독으로, 담담하지만 묵직한 영화를 만든다는 인상이 남아있다. 이동진 평론가의 평도 매우 좋아서 궁금증이 일었다.
영화는 각본가 ‘이’의 시점을 따라간다. 예고편과 포스터에서 ‘설국’을 강조해서 초장부터 눈이 쏟아지는 장면을 기대했는데 정반대였다. 한여름의 해변. 성난 파도 소리. 장마. 주인공 ‘이’가 쓴 작품이다. 일부만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 속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영화는 상당히 이미지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 같다. 바다 장면 때문인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이사’가 떠올랐다. 시사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 시간이 진행된다. 각본가를 꿈꾸는 어느 여학생이 ‘각본과 영화의 간극’에 대해 묻고 ‘이’는 바다 장면의 촬영이 어려웠겠다는 것과 자신은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감독과 진행자, 시사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두 손사래를 친다.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물을 마시는 ‘이’. ‘이’는 진심이다.
‘이’는 한국인으로 일본에는 꽤 오래 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나 드라마의 각본가로 먹고 살 수 있는 걸 보면 실력이 전혀 없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이’는 자신은 재능이 없으며 슬럼프에 허우적대고 있다—그렇게 보인다. 그러던 중 ‘이’는 한 평론가의 유품으로 받은—유품이라고 하나 거창하지 않다. 평론가가 많은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중 하나를 쌍둥이 동생이 주었다.— 카메라를 들고 돌연 눈이 많이 오는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즉흥 여행이기에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 편하게 쉴 수 있는 그럴 듯한 호텔은 만실. ‘이’는 물어 물어 관광지와 떨어진 어느 여관에 묵게 된다. ‘이’는 사회성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여관 주인 ‘벤조’와 하룻밤을 보낸다. 성적인 내용의 하룻밤이 아니라 정말 밤을 같이 보낸다. 여관이라고 하지만 독실이 없어 주인과 손님이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잔다. 영화는 그 이후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그리고 ‘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나는 말의 틀에 갇혀 있다.’
이 대사는 ‘이’의 현재 심정을 압축한다. 각본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말로 써야 한다. 말로 쓰는 건 화자의 뇌를 거쳐 정제된다는 것과 같다. 같은 것을 봐도 느끼는 바가 다르면 내용은 전혀 달라진다. ‘이’가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한국에서 쓰던 물건도 일본에서는 다르게 부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을 것이고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어가 익숙해지고 일상이 되면 흥미가 떨어진다. 나이를 먹으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이런 과정과 비슷하다. 저장 효율과 과부하 방지를 우해 일상에서 겪는 반복적인 일들을 뇌에서 지운다고 한다. 이처럼 일상에 익숙해진다는 건 늙고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각본가에게 늙는다는 건 새로운 스토리를 쓰지 못한다는 것과 같을까? 일상에 겪을 수 없는 일 혹은 일상이더라도 새로운 관점을 보여줘야 관객이 찾을 것이다. ‘이’가 각본과 영화의 간극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한 건 자신이 각본을 쓰면서 그린 그림과 감독이 구현한 그림이 다르고 감독이 구현한 세상이 더 감각적으로 느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가 여행을 갑자기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베란다에서 보이는 전철을 카메라로 찍고 난 직후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본 일상이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이’는 일상에 익숙해져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지만 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여관에서 ‘이’는 토끼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 미닫이 문에 그려진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궁금해 한다. 사람들이 지나칠 것을 ‘이’는 넘어가지 않았다. ‘이’는 재능이 없지 않다. 오히려 넘친다. 그래서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을 예민하게 꼬집었다.
‘이’는 여관 주인과 비단 잉어를 훔치고, 비단 잉어가 얼어죽고,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일련의 소동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중요한 사건처럼 느껴지기엔 규모도 작고 특별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는 특별한 경험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따스하게 내린 햇볕을 보며 익숙함에 잃어버렸던 일상을 되찾은 기분일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영화는 컷과 컷 사이에 배경을 길게 보여준다. 폭풍우가 쏟아지는 바다. 함박눈이 내리는 여관. 무릎까지 올라온 눈을 헤치며 나아가는 인물들. 일부러 여백을 배치하면서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감독은 관객에게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보다는 관객마다 새로운 걸 찾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풍경에는 정답이 없다. 관찰자의 감정만이 오롯이 남을 뿐이다.
두 편의 만화(소설이 아니다?!)을 엮었다고 한다. 한편은 태풍이 오는 한여름, 한편은 눈이 끊임없이 내리는 한겨울을 정반대되는 계절을 배경으로 두고, 또 등장인물도 달라서 마치 두 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영화 한 편 값으로 두 편을 볼 수 있으니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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