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자기 자신의 편견과 사회의 편견 때문에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평생동안 자기들의 유토피아만을 갈망했던 남자들의 이야기"
이안감독을 좋아한다면,
히스레저를 좋아한다면,
대자연이 주는 힐링을 좋아한다면,
가슴이 미어지는 먹먹함을 느끼고 싶다면,
진정한 나를 드러낼 도피처를 찾고 있다면,
자신을 억죄는 억압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보세요,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스와 잭은 브로크백 마운틴의 인력사무소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먹고 자며 양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된 두사람은 광활한 대자연을 집으로 삼으며 단순한 노동을 하고, 쉴 때는 위스키를 마시며 서로를 알아간다. 일찍 부모님을 여윈 애니스와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잭. 두 사람은 카우보이 모자를 쓴 상남자의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면은 깊은 외로움과 연약함이 가득했고 따듯한 연대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두사람은 술에 취해 한 텐트에서 잠을 자고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게된다. 그리고 다음날 서로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게이가 아니라고.
두사람의 관계는 점점 깊어지지만 급작스런 폭풍으로 양치기 업무는 종료된다. 다음 해에도 만나고 싶어하는 잭과 달리 애니스는 쿨하게 떠나지만 애니스는 잭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주저앉아 오열한다. 주먹으로 벽을 때리며 울음을 참내고, 행인에게 거친 욕설을 하면서까지 우는 모습을 숨기려는 그의 행동은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만을 표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장면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강박에 갇힌 남성의 모습, 그리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음에도 사회적 통념때문에 그것을 택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 해 잭은 용기를 내어 브로크백 마운틴의 인력사무소를 찾아가지만 약혼자 알마와 결혼을 한 애니스는 그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사무소장에게 애니스와의 관계를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그 때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그 후 잭은 남성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로데오 대회를 전전하다, 로데오경기장에서 만난 로랜과 결혼을 한다. 그녀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듯 했지만 부유한 사업가인 로랜의 아버지는 잭을 한 가정의 가정으로써 인정하지 않았고 잭은 자신의 가정에서 조차 자리를 잡지 못한다.
4년 뒤, 잭은 애니스에게 엽서를 보내고 두 사람은 재회한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음에도 채워지지 않았던 근원적인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서로의 존재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여행을 떠난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 오직 두 사람만의 에덴동산이었고, 그곳으로의 여행은 기성사회로부터의 탈출이며 자아의 실현이었다. 1년에 2-3차례 가는 여행이 아쉬웠던 잭은 애니스와 더 자주 함께하기를 바라지만 애니스는 가장으로써의 책임감과 가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가정에도 잭에게도 집중하지 못했던 애니스는 결국 이혼을 당한다.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애니스는 가정이 생기면 자신의 외로움이 극복될 수 있다고, 무리와 비슷한 형태를 취하면 자신의 삶도 안정을 찾을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구원은 각자마다 다르듯 애니스에게 가정은 구원이 아닌 허상이었다. 애니스가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정이 얼마나 허망하게 소멸되는지를 보며 우리는 원하는 것을 미루면서 부여잡고 있는 허상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놓지 못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애니스의 이혼소식에 잭은 한달음에 달려가지만 애니스는 이번에도 잭을 거부한다. 애니스의 아버지는 어린 애니스에게 마을사람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게이의 시체를 보여준 적이 있었고, 그 것이 트라우마가 된 애니스는 잭과 함께 하게되면 자신도 그러한 최후를 맞이 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애니스의 아버지처럼 우리의 부모, 학교, 미디어는 노숙인, 가난한 자 등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노출하면서 아이들에게 너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공포감을 심는다. 이렇게 세뇌된 강력한 이미지는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이들은 스스로 도전을 포기하고 자아 실현보다는 안전을 택하는 소극적인 성인으로 자라게 된다. 애니스는 중년의 남성이 되어서도 자신의 삶의주체가 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나와 반대되는 한명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지만 나와 반대되는 한 사회 앞에서는 당당하기 힘들테니까.
몇달 후 애니스는 잭에게 엽서를 보내고, 엽서는 수취인 사망이라는 표식과 함께 돌아온다. 애니스는 잭이 장인의 사업장에서 타이어를 고치다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유골을 브로크백 마운틴에 뿌려달라는 고인의 바램을 들어주려 잭의 부모님을 찾지만, 잭의 늙은 아버지는 유골은 가족묘에 묻혀야만 한다며 그의 제안을 완강히 거절한다. 죽어서도 부모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잭의 모습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라는 그늘 밖을 나서지 못하는 우리들을 모습을 대변한다.
알마와의 이혼으로 가정이라는 허상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았듯이, 갑작스런 잭의 죽음으로 애니스는 소중하게 아껴온 것 또한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인 '맹세할게'는 다시는 현재의 행복을 뒤로 미루지 않겠다는,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애니스의 다짐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내와 딸, 사랑했던 이가 떠나고 작은 트레일러에서 쓸쓸이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 애니스의 모습은 참혹하게 구타당한 게이의 시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애니스와 실헤당한 게이의 삶 중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일까, 어떤 선택이 더 나은 선택일까를 생각하게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이 영화를 카우보이 시대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던 게이 커플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정말 원하는 것이 있지만 사회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때문에 원하는 것을 추구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울타리들, 잭의 아버지, 잭의 장인어른, 인력사무소장, 애니스의 아버지 등은 모두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가부장제는 여성뿐만 아닌 남성까지 억압하는 제도이며 남성이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게 하면서 남성다움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스스로가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면서도 제멋대인 아들을 제압하기 위해 엄격한 가부장을 자처하는 잭의 모습은 끝나지않을 듯한 악순환을 떠올리게 하지만, 다 큰 딸을 성인으로써 인정하고 인간대 인간으로 마주하며 담담하게 출가시키는 애니스의 모습은 그와 반대되는 긍정적인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를 보며, 애니스! 다 내려놓고 잭에게 가!라고 말할 수 있는 관객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고, 매일 같이 로데오게임을 하며 제압할 수 없는 소를 제압하기 위해 애 쓰고 있다. 우리는 나로써 살고,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파란새가 노래하고 위스키 강이 흐르는 브로큰백 마운틴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