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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카페, 1987

영화리뷰

by 나썽

"최악의 상황에 처한 두명의 여인이

서로에 대한 편견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체가 되는 이야기"



가만이 앉아있는데 눈물이 뚝 떠어진다면,

낮아진 자존감 때문에 괴롭다면,

밀린 육아, 쌓인 업무 때문에 매일이 감옥같다면,

낯섬이 두렵고 용기가 어렵다면,

몽롱한 기분으로 영화에 취하고 싶다면,



보세요,

바그다드 카페






흑인과 백인이 서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친구가 되는 영화가 종종있다. 바그다드카페는 이런 영화의 여성버젼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버디무비를 넘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써 우리가 연대할 수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인공은 뚱뚱한 중년 백인 여성 야스민과 빼빼마른 중년 흑인 여성 브랜다가 주인공이다. 자동차 여행 중 남편과 다투게 된 야스민은 고속도로 한복판에 떨궈진다. 남편은 매정하게 야스민을 지나치고, 타이트한 치마정장을 입은 야스민은 뒤뚱거리며 땡볕 아래를 걸어 바그다드 카페에 도착한다.


바그다드카페는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목의 주유소이자 모텔이자 카페이다. 이곳의 주인인 브렌다는 무능력한 남편, 사춘기 딸, 하루종일 피아노만 치는 아들과 갓난쟁이 손자를 챙기면서 카페 운영과 집안일까지 모든 것을 혼자하는 극성 아줌마이다. 안그래도 힘든 일상에 잔소리를 못 견딘 남편은 집을 나가고 커피머신까지 고장이나 커피도 팔수없게 되버린 오늘, 브렌다는 카페 앞에 주저앉아 홀로 눈물을 흘린다. 각자의 최악의 상황에서 야스민과 브랜다는 처음으로 만난다.


야스민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브렌다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다. 땀과 눈물은 두여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고된 삶을 의미하고, 그를 닦아내는 손수건은 앞으로는 이러한 고됨이 해소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거울처럼 마주본 채 각자의 얼굴을 닦는 행동은 두 사람이 겉모습은 다르지만 내적으로는 닮아있음을 보여준다.


야스민은 브렌다를 보자마자 식인종 원주민을 상상하고, 브렌다는 야스민을 보자마자 독일인 나찌를 상상한다. 서로에 대한 편견을 가진채 야스민은 바그다드 카페에서 장기투숙을 하게 되고, 브렌다는 이 곳과 어울리지 않는 외지인 야스민을 경계주시한다. 브렌다는 다른 장기투숙객들은 식구라고 칭하며 친절을 베풀지만 야스민은 손님이라고 선을 그으며 쌀쌀맞게 대하고 심지어 보안관을 불러 야스민을 내쫓으려한다. 공동체 안에 녹아들 수 없음을 느낀 야스민은 방안에서 홀로 슬피 운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야스민은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마술을 연습하고 브렌다의 업무를 줄여주기 위해 진심으로 돕는다.


서로 편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유독 브렌다가 야스민을 더 싫어하는 이유는 브렌다의 영역에 야스민이 들어왔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흑인과 백인, 빈곤층과 상류층이라는 구도에서 브렌다는 약자의 편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계층을 넘어서기 위해 야스민은 용기를 내 먼저 다가가고, 거절을 당해도 다시 다가간다. 나를 거부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은 용기이다. 하지만 이 용기가 없다면 우리는 화합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힘들 것이다.


브렌다는 아들이 치는 피아노소리를 늘 시끄럽다고 했지만 야스민은 아들의 유일한 관객이 되어준다. 야스민은 점점 브렌다의 아이들과 친해지고 까칠한 브렌다보다 따뜻한 야스민이 편했던 아이들은 야스민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화가 난 브렌다는 내 애들말고 니 애들과 놀라며 야스민에게 매정한 말을 하고, 야스민은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때 브렌다는 야스민도 자기처럼 너무나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야스민에게서 자신을 본다. 서로가 가진 감정적 공통분모를 알게되면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동질감이 생겨난다. 이러한 공감은 타인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고 타인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써 인정하게 하는 평등의 기초가 되는 감정일 것이다. 야스민의 상처를 알게 된 브렌다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넌지시 말하며 사과를 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사이는 가까워진다.


커피머신이 고장이 나 커피를 팔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공간이었던 바그다드카페는 야스민의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팔게 되면서 정상적인 모습이 되어간다. 야스민은 투숙객을 챙기고, 손님을 유치하고, 브렌다를 도우면서 커피메이커처럼 자기의 존재감을 찾는다. 자기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던 브렌다도 야스민을 통해 타인에게 도움받는 법을 배우면서 점점 평점심을 되찾는다.


야스민이 바그다드 카페에 녹아들면서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은 의상의 변화로 표현된다. 야스민은 첫날에는 꽉 낀 여성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헐렁하고 편안한 중성적인 옷을 입는다. 남편의 차에서 내릴 때 남편의 가방을 잘못 가져나와 남성의류밖에 없었던 탓에 자신만의 스타일로 옷을 리폼한 것이다. 또한 야스민은 화가 투숙객의 첫그림모델을 할 땐 어색하고 소극적이었지만, 마지막 그림모델을 할 땐 몸매를 드러낸 과감한 모습을 뽐낸다. 이는 여성다워야한다는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면서 가장 자기답고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사회가 여성에게 입히는 코르셋에 대한 해방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변화를 은유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던 와중, 야스민은 브렌다가 불렀던 보완관에 의해 불법체류를 이유로 귀국을 하게 된다. 하지만 몇 달 뒤 야스민은 다시 바그다드 카페에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우연히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손님이 아닌 식구가 되어 바그다드 카페에 도착한다. 야스민과 브렌다와는 함께 바그다드카페를 운영하고 브렌다에게 시끄럽기만했던 아들의 피아노소리는 이제 바그다드 카페를 메우는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두사람의 특색으로 가득찬 바그다카페는 황량하고 삭막한 길목의 오아시스같은 공간이 되어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 마지막에 야스민은 투숙객 화가에게 청혼을 받고, 브렌다가 남편과 재결합하면서 남성이라는 존재가 재등장하고 감독은 그렇게 진정한 가족을 완성시킨다. 이는 여성들의 연대 영화로 마무리 될 것 같았던 영화가 한번 더 확장되는 대목으로 여성의 주체성 확보가 불완전한 가부장자의 보완이 될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야스민의 전남편은 중산층이었지만 그녀를 억압했고, 브렌다의 남편은 착했지만 무능력했다. 가장으로써의 올바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남편이 못마땅했지만 어떻게 대체해야할지를 몰랐던 그녀들은 그녀들 스스로가 가장이 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지금도 사회 곳곳에는 가치관, 성별, 종교, 정치성향, 사회계층 등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남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현상들이 빈번하며, 혼자가 낫다고 자기 위안하며 고립된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그다드카페는 이런 현세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이다. 바그다드카페는 타인을 인정하는 법을 배움과 동시에 진정한 나다움을 찾을 수 있고,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 가족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서로를 인정하고 연대했을 때 공동체는 행복해진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바그다드 카페를 찾기 위해 너무 애쓰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브렌다가 그랬듯,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바그다드카페가 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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