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의 영화 리뷰] 데몰리션(2015)
우리는 언제나 슬픔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주변의 슬픔에 무신경하게 굴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의 슬픔의 배경을 알고 싶어 하고, 감정에 공감하고 위로해 주려 노력하죠. 하지만 그 슬픈 감정에 공감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들은 저마다의 기준을 정해 누구는 더 슬퍼하고 누구는 덜 슬퍼하고를 잣대를 들이대 평가하기도 합니다. 마치 슬픔을 경쟁하는 것처럼. 이 사람은 눈두덩이가 다 부을 정도로 울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니 합격이야. 이 사람은 울지도 않고 아무 말도 않하네? 혹시 사이코패스 아닐까? 가령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너무 쉽게 평가해버리고 너무 쉽게 믿어버립니다. 정작 우리도 해줄 수 있는 말이란, "괜찮아질거야", "힘내, 이겨낼 수 있을거야."같이 피상적인 문장 뿐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슬픔을 다루는 데에도 물론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별이란 꽃잎이 저물듯 천천히 오는 것이 아니라 덤프 트럭의 속도로 우리를 순식간에 뭉개고 지나가버리기 때문이고 그 이전에 누구도 우리에게 슬픔을 다루는 법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심지어 슬픔을 느끼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그것이 진정 슬픔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합니다. 오늘 밥을 굶은 탓이겠지 혹은 사고 싶었던 것을 사면 좀 기분이 나아질거야. 슬픔이라 생각하기 싫은 감정을 너무나 미숙하게 다룹니다. 슬픔이라 단정짓고 나면 정말로 슬픈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고이기 시작했는지 모르는 그 슬픔을 고치려는 거 자체가 우리에겐 너무 피곤한 일이 되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일상에서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과업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슬픔을 인정하기엔 너무 지친 나이가 되어버렸죠.
영화 데몰리션에서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한 '데이비스'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보통 우리가 아는 방식과는 상이합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에서 자판기에서 초콜릿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항의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늘 언제나처럼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직장으로 출근하죠. 데이비스의 이런 행동은 직원들은 물론 그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인 그의 장인어른마저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장인어른은 그런 그를 술집에 데리고 가 딸의 상실에 대한 슬픔을 공유해보려 노력합니다. 감정을 잘 숨기는 것이 보기 좋다고 칭찬까지 하죠. 그런데 장인어른에게 데이비스는 뜬금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 분위기 때문이네요. 여기가 비싼 이유요. 방금 생각이 났어요."
막 술집으로 들어왔을 때 장인어른이 여기가 칵테일 한 잔에 무려 18달러나 한다는 것에 대한 대답이었죠. 장인어른은 그런 대답을 한 데이비스를 보며 당황합니다. 마치 해석할 수 없는 상형문자로 가득한 오벨리스크와 대면하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요.
같이 술집에서 나온 후 장인어른은 데이비스에게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딸아이의 보험금으로 재단을 세울 계획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자판기 회사에 환불 요청을 하는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그의 편지의 내용은 점점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아내의 카푸치노 머신 이야기부터 5년동안 출근길 기차에서 마주친 남자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것과 갑자기 기차를 세운 것까지 말이죠. 데이비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마침내 솔직해진 걸까요? 그리고 그 이후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공항에서 여행객들의 가방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하고 주방위군에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요즘 눈에 띄는 것들이 많아졌어요.
어쩌면
보긴 봤는데
무심하게 본 거겠죠.
그에게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궁금해합니다. 장인어른의 말미따나 철판과 모터, 나사 하나 하나까지 뜯어보고 문제를 생기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을 찾으려 합니다. 물이 새던 냉장고부터 시작해서 삐그덕 거리는 화장실 문, 아내의 커피머신,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집까지 분해하는 지경까지 다다릅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오히려 분해보단 파괴에 가까워보였습니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Demolition'인지 알 수 있었던 대목이었죠. 그리고 그의 이런 이상행동은 자신의 삶까지 파괴합니다. 데이비스는 다시 자판기회사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간밤에 냉장고를 부숴버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장인 어른께서 말씀하시길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 뭐가 자네를 강하게 하는지.
사람 마음 고치는 것도 자동차 수리와 같아
철저히 살펴본 후에
다시 끼워 맞추는 거지
그러나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이 '수리'가 아니라 '파괴'인 것은 분해 뒤에 다시 재조립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스 자신도 자인하길 자신은 수리공 보다는 기계치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데이비스는 그저 자신의 파괴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사물들이 형태를 잃어 제거되는 것에 희열을 느낍니다. 통찰력 없이 무작정 사물을 뜯고 살펴봤자 문제가 되는 요인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고 마음 아래 깔린 기저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도 우리는 결국 제자리에 서있을 겁니다.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것은 자동차를 고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고치고 싶어도 우리의 감정이 본래 무슨 모양이었는지 다시 끼워맞출 수 있는 청사진이란 없으니까요.
냉장고를 분해했던 밤에 데이비스는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가 항의 편지를 보낸 자판기 회사에서 고객센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캐런의 전화였죠. 그녀는 편지를 보고 많이 가슴이 아팠다고 말하며 거리를 두고 데이비스를 지켜보려 하지만 데이비스가 출근길에 자신을 미행하던 캐런을 눈치 채고 난 뒤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캐런의 아들 크리스도 그런 둘의 사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데이비스가 자신을 문제아로 보지 않는 태도와 갖은 기행에 점차 마음을 열게 되죠. 데이비스는 이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둘은 평범한 모자지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캐런은 크리스가 다시 착한 아이로 돌아왔으면 하고 바라고 크리스는 캐런이 대마초를 하고 사장겸 애인이 출장을 간 사이 남자를 들인 것을 탐탁치 않게 여깁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다른 사람마저 고치려 애를 씁니다. 애원하기도 하고 빌기도 하고 때론 윽박을 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격언처럼 우리는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캐런은 사실 동성애 성향이 있던 크리스가 클럽에서 게이라고 죽도록 얻어맞고 병원으로 실려온 날에 그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네가 숨김없이 당당하길 바란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보는 데이비스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가 슬픔을 다루는 데에 미숙한 까닭은 슬픔을 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슬픈 기색이라도 보이면 나약해보이고 나약하다는 것은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슬픔을 계속 덮어두고 살다보면 결국 병이 되고 맙니다. 문득 2010년도 쯤에 '행복전도사' 작가 겸 방송인이셨던 故 최윤희씨가 남편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한 사건이 떠오릅니다. TV 화면 너머에서 언제나 밝고 명쾌한 모습만 보여주던 연예인들이 목숨을 끊은 비극적인 일도 우리가 슬픔을 내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간극이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자기네 고장을 홍보하는 문구에는 '행복'과 '기쁨'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너무 슬퍼하면 고인이 길을 잘 못 떠난다며 웃고 떠드는 경우 또한 종종 보곤 합니다. 허나 오히려 우리는 기쁨보다 슬픔이 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슬픔을 아는 사람은 있고 슬픔을 겪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해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으니까요. 장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에서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라는 구절처럼 여러분도 이 영화를 통해서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의 의미를 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마음 속 깊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듯이 슬픔 또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넉넉하게 드러내고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