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의 영화 리뷰] 남극의 쉐프(2009)
세상에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드물지만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남극 돔 후지 기지로 파견된 영화 속의 8인의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우 해상보안청에서 근무하는 한 남자의 요리를 먹기 위해 평균 기온 영하 54도에 육박하는 극한지로 왔을 리가 만무하니까요. 하지만 영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포커스는 그들이 남극에서 하는 연구와 작업이 아닌 식사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매일 마주하는 밥상을 대하는 자세의 각각의 성격과 살아온 삶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은 유독 요리를 주제로 한 창작물을 많이 만드는 것 같습니다. 2007년에 개봉한 <카모메 식당>도 그렇고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와 카페를 개업한다는 내용의 <해피 해피 브래드>, 김태리, 류준열 주연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도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요. 그리고 앞에서 나열한 영화들의 분위기가 그러하듯 이 영화도 혹한지인 남극이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플롯은 소소하게 그리고 아주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본 영화의 주인공이자 내레이션인 니시무라 준(사카이 마코토扮)은 남극 탐사 대원을 희망하던 선임의 불의의 사고로 남극 기지로 차출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반강제로 끌려온 남극행임에도 불구하고 나사가 빠진듯한 다른 탐사 대원들에 비해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로 나옵니다. 수염도 제대로 밀지 않고 너저분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언제나 단정한 모습을 보이고 요리를 함에 있어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요리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대원들이 몰래 주방을 뒤져 라면을 끓여먹는 것을 눈 감아주거나 거대한 닭새우를 튀겨먹자는 대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그대로 튀겨줄 정도로 심성이 유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영화는 뚜렷하게 우리의 마음을 흔들만한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극이라는 극한의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더 씽>같은 정체불명의 괴물도 없고 살벌한 눈보라와 크레바스를 넘나드는 긴장감과 아찔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공 니시무라가 내놓는 따뜻한 밥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바이러스도 살아남지 못하는 살벌한 남극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탁만 있다면 일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꼽자면 주인공 니시무라가 다른 대원들의 다툼을 말리다가 일본에 있는 딸 유카의 유치를 잃어버린 바람에 상심하고 다른 대원들이 그를 위해 요리를 하는 장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엔 대원들은 미안하다며 니시무라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하지만 니시무라는 좀처럼 방에 틀어박힌 채 박힌 채 나오질 않고 대원들은 식당에 삼삼오오 모여 서 투룬 솜씨로 전쟁통을 방불케 하며 요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식탁에 올라온 눅눅하기 짝이 없는 닭튀김을 보며 니시무라는 쉽사리 젓가락을 대지 못합니다. 대원들은 니시무라가 먹지 않는 것이 자신들이 요리를 망쳤기 때문이라고 오해하지만 사실 남극으로 오기 전 아내가 해줬던 눅눅한 닭튀김이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닭튀김을 베어 물며 체할 것 같다며 투정을 부리면서 고향에 있는 아내와 딸 생각에 끝내 울음을 터트립니다.
이따금 우리는 니시무라처럼 그냥 단지 밥이 아니라 그 밥에 담긴 추억을 먹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매일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은 밥상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게 됩니다. 혼자 먹으면 '최악의 음식'이 그 음식을 차린 사람과 함께 둘러앉은 사람들 덕분에 내 생애의 '최고의 음식'이 되기도 하죠.
그래서 남극이라는 목적지 아래 모인 생 판 남인 그들이 한 식탁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친구 나아가 가족이 되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네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더욱 마음이 가는 영화로 제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가족들과 살고 있지만 가족 모두 다 모여 식사를 했던 적이 대체 언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이 늦게 끝나서, 다른 사람과의 저녁 약속 혹은 배가 고프지 않아서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고 미뤄온 그 식탁들을 떠올리면 1년 반 동안 매일 밥상머리에 모이는 8인의 남극 탐사대원들보다 오히려 지금의 저는 더 가족답지 못한 가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주말엔 꼭 집에서 가족들과 맛있는 밥을 먹어야겠습니다. 살아있을 때 부지런히 먹고 부지런히 추억을 쌓아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