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의 영화 리뷰] 테넷(2020)
어제저녁에 가족들이랑 코로나 때문에 쉽사리 가지 못했던 영화관을 갔습니다. 입장 전 QR코드를 찍고, 좌석도 한 칸씩 띄어서 앉아야 하고 마스크도 꼭 착용하고 관람하는 게 익숙하지 않고 불편했지만 '테넷'을 보고 상영관을 나오면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영화를 관람하기 전에 감상평을 보며 '영화를 이해하려면 n회차 관람이 필수' 라던가 '스포를 보더라도 뭔 말인지 이해를 못한다'는 말들이 많아서 호불호가 갈릴까 봐 걱정이 많았습니다. 놀란 감독의 전작인 인터스텔라(2014)를 보고 난 뒤에 영화에서 나오는 개념들과 이론을 이해하면서 보려고 무진장 애를 먹었던 터라 이번엔 아예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느끼자라는 마인드로 영화를 감상했는데 그 덕분인지 몹시 유쾌하게 관람했습니다. 어쩌면 아주 예전에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을 읽으며 '엔트로피'의 개념에 대해 얼추 알았던 게 도움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무수히 많은, 그리고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엔트로피, 인버전, 알고리즘, 타임 패러독스(할아버지의 패러독스) 등등. 하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는 이 용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007 시리즈 같은 '첩보물'이니까요. 선역인 주인공이 악당의 계획을 막기 위해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결말에 계획을 무산시킨다. 거기에다 시간 역행이라는 과학적인 요소가 담긴 걸쭉한 소스를 끼얹었을 뿐. 007 시리즈를 애청하셨던 분이시라면 아마 <테넷>과 007 시리즈가 매우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테넷을 다룬 다른 리뷰들을 보면 거의 다 영화에서 나오는 과학적인 설정과 오류에 대해 주목하시는데 저는 영화를 핵심적으로 관통하는 철학적인 메시지에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영화에서도 계속해서 언급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테넷이 믿고 있는 '결정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되도록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해 자유의지란 말 그대로 '나로서 비롯되는 의지'를 뜻합니다. 주변에 어떤 강제나 외압 없이 자신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의지고 이는 곧 '자유로운 행동'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에 주인공이 계획에는 없었지만 오페라 안에 있는 관객들을 살리기 위해 다시 극장 안으로 들어가 폭탄을 제거한 것이 주인공의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CIA의 작전 계획 상에 관람객들을 구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이는 상부의 명령이 주인공의 행동에 개입했기 때문에 '자유의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요.
그리고 자유의지에 대비되어 '테넷'이라는 조직이 믿고 있는 '결정론'이 나옵니다. 영화에서의 현재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에서 본 결과를 토대로 주인공이 지금 '자유의지'라고 생각하며 했던 관객을 구출하는 행동도 결국 결정된 것이라는 거죠. 닐이 말한 것처럼 '독재자들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죽는 걱정을 하지 않는다'와 '일어날 일은 꼭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테넷'이라는 조직은 '결정론'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왜 영화에서 그들은 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믿는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봤던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된 미래와 상반되는 다른 미래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인물(주도자=주인공)이 미래의 결과를 알게 된다면 미칠 영향을 두려워하며 미래에 대해 전혀 말해주지 않습니다. 주도자가 닐에게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작전을 성공했다는 거 아냐?"하고 넌지시 물을 때도 닐은 긍정적이라고 에둘러 말할 뿐입니다. 하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무조선 일어나게 된다는 믿음과 일어나야 할 일을 일어나게 하도록 하는 이런 노력이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과연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를 부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정론'에 관한 간단한 예시를 하나 더 들자면 우리가 미래의 나에게서 편지를 한 통을 받았다고 가정해봅시다. 미래의 나는 오늘 내가 로또를 사면 이번 주에 당첨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속는 셈 치고 미래의 메시지를 믿기로 결정을 하고 1등에 당첨됩니다. 미래의 우리의 메시지대로 운명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미래의 우리에게서 로또가 당첨되지 않는다고 통보받게 되고 이를 믿으면 우리는 아마 로또를 사지 않겠지요. 그리고 로또를 사지 않았기 때문에 로또에 당첨되지 않게 됩니다. 어차피 미래는 결정돼있으니 로또를 샀어도 당첨이 안될 것은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로또가 당첨될 것을 알면서도 만약 우리의 '자유의지'로 로또를 사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우리의 '자유의지'로 로또를 사지 않게 되면 미래의 나도 로또가 당첨되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을 테니 어차피 미래의 메시지를 받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 그렇다고 할 지라도 어쨌거나 미래의 메시지를 받았고 로또를 사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심결에 손을 넣은 코트 주머니에서 로또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놀란 감독은 우리 몰래 코트 주머니에 복권을 넣어둔 사람을 '테넷'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나의 '자유의지'와 내가 미래를 믿지 않을 것을 추측하고 있는 '테넷'의 '자유의지'가 충돌하여 결국 결정론적인 미래로 치닿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놀란 감독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영화 시나리오를 구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피노자는 결정론 쪽에 기울었지만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스피노자는 현상계 안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 역시 다른 원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며 인간의 자유를 원인에 구속받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닌 원인이 정해져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성을 통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적합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테넷의 일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말 부분에 닐은 아이브스에게 그 문을 딸만한 사람은 나뿐이지? 하고 묻고 아이브스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자신의 죽을 미래를 향해 걸어가려 합니다. 그런 닐에게 주도자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닐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답을 합니다. 그리고 주도자에게 훗날을 기약하며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과거의 주도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마치 세상이 멸망해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처럼 말입니다.
테넷은 정말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액션신도 저를 즐겁게 했고 가볍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악당의 계획을 막기 위한 영웅의 이야기니까요. 원래 매주 월요일 목요일 연재인데 어제 이 영화를 보고 늦기 전에 리뷰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에 금요일로 늦어지게 되었는데 이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본 리뷰를 보고 테넷을 n회차를 관람할 계획이 있는 분들이라면 과학적인 설정에 주목하시면서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총체적으로 놀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철학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