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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체 Mar 20. 2024

아시안패싱을 대하는 나의 자세

참지 않는 아시안은 용감하고 피곤하다

최근에 한국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사건이 있다. 오스카 시상식에서 엠마스톤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그 이전해 수상자인 미셸 여와 키 호이 콴을 트로피만 받고 제대로 된 눈 맞춤, 인사도 없이 지나친 그 사건.



백인의 나라 스웨덴에서 유색인종 한국여자로 사는 내게 이 일련의 사건은 단순히 와... 열받는다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이 현실을 어제도 살았으며 오늘도 살아냈고 내일도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차별과 혐오, 편견에 대한 이야기는 쓰기 쉬운 주제가 아니다. 나는 한국에 있으며 손흥민, 지소연과 같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스타들이 차별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입장이 아니고, 직접 차별에 맞서 싸우는 곳에 서있기 때문이다.


양다솔 작가가 그랬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글을 쓴다고. 그래서 나도 써야 했다. 나에겐 이것이 제정신인가?라는 납작한 분노로는 끝나지 않는 여러 가지 마음이 속을 시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관련 뉴스를 본 이후로 나는 방언이 터진 사람처럼 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파트너에게, 친한 친구에게, 그리고 나의 스웨덴 동료들에게. 특히 동료들에게 더 열심히 이야기를 전했다. 매일 한 명씩 골라 점심을 먹는 동안 그 얘기를 들려줬다.


왜?


일주일 전 사건이 발생했고, 그 이틀 후 일본인 친구가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그런 말을 했다. 있잖아, 근데 난 오늘도 그거 당했다? 남자친구(스웨덴 사람)랑 식당에서 밥 먹는데 웨이터가 주문받는 순간부터 끝까지 나는 한 번도 안 쳐다봤어. 그래서 나갈 때 스웨덴어로 Tack(고마워)라고 했더니 그제야 나를 보더라. 남자친구에게 그 얘기했더니 그냥 걔가 이상한 애라고 무시하래. 나는 이게 일상인데. 나한테 뭐가 문제가 있는지 묻는 게 버릇이 되었는데도 걔는 그저 가끔 일어나는 황당한 일로 치부하더라.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고 그녀는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 항상 덜 좋은 대접을 받는 동양인 여자친구로서 그녀의 고통을 나도 정확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겪지 않았어도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같이 아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집요하게 만나는 동료마다 물었다.


'너 이 기사 봤어?' '오스카 시상식에서 논란된 거 봤어?'


'아니 몰랐어...'로 일관된 대답을 들었다. 내게는 감정소모인 일들을 일일이 다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피곤하지만 적어도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모르는 것은 참을 수 없기에 몇 번이고 다시 같은 얘기를 했다.


할 때마다 열불이 났으나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경험상 분노는 나의,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는데 별로 유용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듣는 이가 가해자와 같은 그룹에 있다면 다수는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되므로.


동료 중 한 명은 내가 스웨덴에서 인종차별을 겪었는지를 물었다. 어떤 걸 겪었는지가 아니라 겪었는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모른다. 자기 옆에서 매일 밥을 먹고 함께 일하는 동료도 인종차별을 겪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미 수십 번은 반복해서 또 말하기엔 피곤하지만 내게는 아직도 가장 충격을 주었던 인종차별을 선사한 미국인 아저씨 얘기를 해줬다. 어느 아름다운 봄날 스톡홀름이 내다보이는 미술관 카페에서 '아시안은 너무 이상해...'라고 나와 친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던 그 무식한 종자에게 '아시안은 영어 못 알아듣는 줄 아나 보네?'라고 영어로 대꾸한 일을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잘했다 한 방 먹였네! 등등의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너의 경험을 얘기해 줘서 고맙다고. 네가 아니었다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기에 많이 배웠다고.


말해봤자 시원하지도, 당장 무언가를 바꾸지도 않으며 오히려 나를 피로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도 누구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용기를 내서 할 것이다. 아직 사람들을 믿기 때문이다. 작은 나의 이야기와 질문이 내 동료를 거쳐, 그들의 친구와 가족을 거쳐, 언젠가는 무슨 변화라도 만들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나는 용감하고 그 때문에 피곤한 아시안을 자처한다. 다음 혹은 다다음 세대는 나처럼 이런 얘기하느라 피곤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기를 바라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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