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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체 Sep 25. 2020

스웨덴 서해안 여행기

02. 로드트립이 서막이 열리고

준비물, 어느새 짐 싸기의 달인


나는 보통 짐을 아주 빠르게 싸는 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아주 단출하게 챙기곤 한다. 2박 3일의 여정이라면 겨울이라도 평소에 쓰는 백팩 하나면 충분한 정도라, 교환학생 시절 고등학교 친구를 암스테르담에서 만났을 때 서로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고작 4박 5일의 여정인데 그 친구가 큰 백팩에 작은 트렁크까지 끌고 온 게 나는 정말 오버스럽다고 생각했고, 친구는 5일이나 집을 떠나 있는데 고작 백팩 하나 가져온 나를 보고 경이로워했다. 


친구의 첫마디는 '짐이 정말 그게 다야?' 


어쨌든, 나는 아주 간촐한 사람이다. 그래서 친구의 섬머하우스에 3일 서해안에서 7일, 총열흘을 집을 떠나 있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뭘 챙겼느냐 하면,


유니클로 후리스, 속옷 여벌 5개씩, 수영복, 양말 5켤레, 버켄스탁 쪼리, 가벼운 셔츠 두 장, 반바지 하나, 블랙 원피스 하나 (어딘가 좋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했었다..), 맨투맨 한 장, 방수가 되고 빛을 반사마저 할 수 있는 신기한 트랙 팬츠 한 벌, 우비, 티셔츠 두 장, 나시 두 장, 까만 레깅스 (신의 한 수), 세면도구, 수건 큰 것 한 장, 겨울 털모자(밤에 잘 때 진짜 유용했다) 선크림, 침낭, 캡 모자, 책 한 권, 노트 한 권과 펜 두 자루, 카메라, 청바지 한 벌 이렇게 넣었다.


적어 넣고 보니 정말 정말 많아 보이지만, 하이킹 배낭 약간 큰 거에 다 들어가는 정도였다. 사실 더 극한으로 달리자면 저 중에서 30프로 정도는 놓고 갈 수 있었으나, 차로 이동할 수 있는 점이나 빨래를 아마도 잘 못할 거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짐은 꽤 잘 챙겨간 것 같다.


로드트립을 하거나 캠핑을 할 예정이라면 언제든 따뜻한 옷과 양말, 모자, 우비는 꼭 챙겨가야 한다. 안 그러면 후회합니다 헤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3박 4일간 친구들과 섬머하우스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드디어 본 여행을 시작했다. 지난 3일간의 햇빛은 자취를 감추고, 떠나는 날 아침은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친구 루바는 '글리터는 챙겼으나 양말은 까먹는' 스타일인데 이날도 역시, 침낭을 두고 갈 뻔했으나 눈썰미가 좋은 친구가 바로 발견하고 출발 전에 차로 가져다줘서 위기를 모면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말리를 만나러 가는 예테보리행 기차에 올랐다. 루바와 나는 기차 안에서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지키고 싶은 가이드라인 세 가지를 정하고 각자의 노트에 적었다. 



이번 여행의 3가지  북극성 

1. 낯선이 와 친구가 되기
2. 어떤 예기치 못한 모험이 다가오더라도 받아들이기
3. 나만의 안전지대에서 한 발짝 벗어나기

환승역인 예테보리에서는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마음만 먹었으면 시내를 걸어 다닐 수 있었으나 열흘 치의 짐을 이고 지고 걸어 다니기에는 마지막 이틀을 여기서 보낼 예정이어서 빠르게 간식을 사고 버스터미널로 돌아왔는데, 정말 어찌 된 일인지 우리는 친구가 말한 다른 지명을 향해 가는 다른 버스를 타버렸다. 올라탄 지 2분 정도 후에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버스 기사님에게 물어봤고, 이미 그땐 내리기엔 너무 늦었다. 기사님은 갑자기 뒷자리 여자분과 얘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그 여자분께서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면 우리가 타야 하는 버스로 환승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십분 정도 갔을까 한 정류장에서 이제 내려서 몇 번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고 말해주시는 순간 우리는 보았다 그 버스가 우리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을....... 그러자 기사 아저씨는 클랙션을 마구 누르셨고 우리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앞 버스 기사님이 알아들으시고 우리를 기다려주셔서 한두 시간에 한 대 밖에 안 오는 버스에 무사히 올라탈 수 있었다. 이번 여름엔 나와 친구들에게 뭔가 마가 낀 것인지 (정신을 못 차리고 다니는 건지) 버스를 엄청나게 잘못 타고 놓치고 하며 생각지도 못한 재미난 일들도 일어나곤 했는데, 그 기운이 여기까지 이어진듯하다. 




진짜 로드트립 시작

우데발라(Uddevalla)라는 아주 아주 작은 서해안의 마을에서 말리와 재회를 했고, 간단하게 장을 보고 첫 캠핑지인 스뫼겐으로 출발했다. 여우가 그려진 작은 밴에 올라타서,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우리만의 디스코 파티를 벌이며, 가는 길에 펼쳐진 스톡홀름과는 다른 자연의 모습을 눈에 그리며 스뫼겐을 향해 달렸다. 콧구멍을 스치는 서해안의 공기가 너무 기분 좋았다.


스뫼겐으로 가는 길, 서해안에도 스톡홀름처럼 군도가 엄청나게 많다.


다리를 건너며 우리 셋은 '아 진짜 예뻐'라는 말을 서른 번 정도 반복했다, 그래도 질리지 않았다.


아 진짜 예쁘다고!!

이보다 더 완벽한 첫 캠핑지가 있을까?

스뫼겐에 처음 도착해서 생각한 건 너무 설레발 일지는 모르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여행 오길 너무너무 잘했다. 앞으로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잘 온 건 확실해.' 왜냐면 이런 풍경들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도시인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이런 자연을 마주하면, 종종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크기를 재기 어려운 나보다 거대한 존재의 앞에서 경외를 느끼기도,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내 눈에 담고 있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낀다. 


엄유정 작가님의 책에서 본 한 일화에서는 아이슬란드에서 본 초등학생 아이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난 설경도 그들에게는 일상이기에 그런 풍경 앞에서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아이들답게 장난치고 친구와 투닥거리며 등교를 한다고 했다. 정말 매일 보면 이런 풍경이 정말 익숙해질까? 분명 일주일로는 부족하다. 


배산임수의 요건을 갖춘 캠핑 명당


이 아이가 바로 우리를 싣고 나를 뿐만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거실이, 비가 올 때면 요리를 하는 작은 부엌이, 매일 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일의 모험을 기대하며 머리를 뉘었던 침대가 되기도 했던 작은 밴, 릴라 레벤(Lilla Räven)이다. 말리의 소울 애니멀이라고 하는 여우, 우리를 일주일 내내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이 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잠시 얘기하자면, 말리가 한국의 중고나라와 비슷한 스웨덴의 중고사이트 블로켓에서 구매해 아주 여러 경로를 거치며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는데. 

용접공, 전기공 등을 만나며 내부를 헐고 수리하고 선반을 달고 수납공간을 마련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이퍼 아일랜드 커뮤니티에서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졸업생을 찾아서 차 한 면에 스웨덴의 오로라와 자신의 소울 애니멀을 담았다. 

삐까번쩍한 캐러밴으로 여행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말리가 직접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게 다니며 열심히 고친 릴라레벤은 이십 대의 자유로움과 거칠 것 없는 우리를 무엇보다 잘 나타내 주는 것만 같아서 집에 가는 날이 되었을 때는 섭섭하기까지 했다. 





첫 저녁식사, 할로미 버거(Dinner with a view)


너무 좋다는 말을 천 번쯤 했을 때 즈음, 말리가 이제 간단하게 재료를 챙겨서 우리 로드트립의 대망의 첫 저녁식사를 만들러 가보자고 했다. 제대로 된 캠핑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말리가 천가방에 바리바리 챙겨가는 것들이 대체 뭔지 어림잡아 짐작만 하고, 여기서 정말 버거를 만들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녀는 예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자 이제 너희가 앉고 싶은 자리를 찾아, 그럼 요리를 시작할게.' 


자연에서 캠핑을 할 때는, 우리가 마치 도시에서 어떤 레스토랑에서 어떤 뷰를 보며 먹으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지형에 원하는 풍경을 찾아 그 곁에서 그 날 저녁을 먹을 수 있다.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오던 차라 큰 바위 바로 옆에 앉아서 오늘의 저녁을 만들기로 했다. 도시에서 요리할 때와는 다르게 캠핑에서는 이런 자연의 여러 조건들을 고려해야 하는 게 새로웠다. 


말리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캠핑 메뉴인 할로미 버거를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챙겨 온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가스와 팬, 작은 칼, 주전자, 포크 겸 숟가락 겸 칼로 사용 가능한 하이브리드 수저 등등에 처음 보는 신기한 아이템들도 있었다. 이런 미지의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가게 된다.



미친 듯이 간단한 할로미 버거 만드는 방법 

ㅇ토마토, 오이, 양상추 등 원하는 야채를 버거에 넣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꿀팁: 대파의 하얀 부분을 얇게 잘라서 넣으면 생각지도 못한 풍미가 생긴다. 
ㅇ할로미 치즈를 노릇노릇하게 될 때까지 구워준다.
ㅇ버터에 버거 번을 살짝 데워준다.
ㅇ번 위에 할로미와 남은 재료들을 올려주고 좋아하는 소스를 뿌린 후에 먹으면 된다. 나랑 친구들은 매콤 달콤한 겨자소스를 올려서 먹었는데, 마요네즈나 바베큐 소스를 곁들여서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풍경을 되새기며 잠들기

이 풍경이 익숙해지는 날도 올까? 하고 자문했으나 역시 나는 일주일간 매일매일 새롭게 감동했다


아무리 봐도, 여러 날을 지내도 익숙해지기보다는 매일매일 새로울 것 같은 이 풍경 안에서 우리는 자기 전에 잠시 산책을 하기로 했다. 뷰포인트까지 올라가는 길의 중턱에서는 이런 연꽃을 보기도 했다. 언덕 위의 작은 못에 피어있는 연꽃은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문득 동화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예쁜 친구들, 예쁜 풍경, 일 년간 쉴 틈 없이 달려오다가 드디어 마주한 여유. 인생의 삼박자가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에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놀라웠다. 작년의 나는 이런 풍경을 꿈꾸고 있지 않았는데 인생이란 이래서 재밌고 또 어렵고 그러나 다시 재밌는 법이다. 



친구들과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며 석양을 보고 사진과 동영상으로 순간들을 담기도 하고, 노래를 틀고 우리만의 작은 댄스파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드문드문 친구들과 그냥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눈빛만으로도 우리가 어떤 감정을 공유하는지 너무 분명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자연은 그런 마법 같은 순간들을 우리에게 허용한다. 


행복 100%의 스마일



루바랑 나는 이 여행을, 이 여행이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기다려왔다. 코로나로 학교가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고 가족도 친척도 아주 멀리에 있는 우리는 외로움과 인턴십 헌팅에서 오는 어려움을 몇 달간 함께 겪어왔다. 5월의 어느 날 우리는 여름을 가장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계획들을 써 내려가자고 했고, 7월에는 어딘가 자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고, 그게 이루어진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꼭 글로 적어둬야 한다.
글로 적어 내려가는 순간 꿈, 소망 이런 것들은 형체를 갖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런 것들은 나를 위해 기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긴 여정의 피로가 몰려올 때 즈음 아름다운 오늘의 경치를 뒤로하고 밴으로 돌아왔다. 밴라이프는 잠을 잘 때도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일단 우리의 큰 가방들이나 짐들을 다 앞자리로 옮기고, 에어 매트리스에 공기를 채워 넣은 다음 침낭을 세팅해야 한다. 그러면 잘 준비 완료!


라고 생각했으나 역시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차를 약간 더 옆으로 주차하려고 하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다행히 옆에 있던 캠핑러들이 열심히 도와줬으나 여전히 시동을 걸리지 않았다. 


어쨌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면 된다. 이웃들이 도와주기로 했으니 일단은 잠을 자고 다시 시도해보기로 했다. 


서해안의 공기가, 멀리 마을에서 보이는 불빛이 자꾸 마음을 들뜨게 했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 기분 좋을 정도의 피로, 꽉 찬 하루에서 오는 만족감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안녕, 오늘 고마웠어. 

내일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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