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우리가 하고 싶은 여행은
한국에서도 본죽이나 엄마가 만들어준 계란죽, 전복죽 등으로 아침을 먹을 때가 있었으나 사실 그렇게 자주 먹는 아침 메뉴는 아니었다. 하지만, 로드트립을 하는 일주일 동안은 하루 빼고 매일 아침으로 스웨덴식 오트밀 죽을 먹고 내가 내린 결론, '캠핑을 여는 아침의 하이라이트는 이 오트밀 죽을 만드는 순간'이었다는 것.
여기서는 한국에서 먹는 짭짤한 죽과는 다르게 오트밀을 물에 끓이고 볼에 담은 후에 보통 잼이랑 우유를 곁들여서 먹고, 취향껏 견과류나 말린 과일, 베리를 올려먹기도 한다. 스웨덴이나 덴마크 사람들이 오트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얘기하려면, 일단 오트밀 죽을 전문으로 파는 가게가 있다는 걸 밝혀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https://www.instagram.com/graincafestockholm/
https://www.pomochflora.se/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런치 카페)
궁금한 분들은 들어가 보시길.
스웨덴에서 사는 동안 여러 번 오트밀 죽을 먹은 적이 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말리가 만들어준 이후로는 여행이 끝나고도 종종 해 먹고 있다. 아마도 어떤 음식들은 추억도 맛의 50퍼센트 정도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
그녀가 오트밀을 만드는 방법은 아주아주 간단했다. 그래서 7살 어린이도 따라 할 수 있는 레시피를 공개하기로 한다.
말리의 오트밀
1. 오트밀과 물, 소금 한 꼬집을 냄비에 함께 넣고 약불로 끓인다.
2. 중간에 코코넛 가루, 건포도 (다른 말린 과일도 상관없다), 원하는 견과류를 넣는다.
3. 5-7분 정도 끓인 오트밀과 기타 등등을 볼에 담고 그 위에 시나몬 파우더와 그때그때 있는 과일을 올려준다. (우리는 주로 복숭아, 자두를 올려먹었다!)
4. 방금 만든 포리지의 따뜻하고 달콤한 맛, 아름다운 친구들과 경치를 음미하며 맛있게 먹는다.
오트밀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우리는 스뫼겐(Smögen) 마을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서해안으로 로드트립을 간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스웨덴 친구들에게 추천을 받은 곳이 바로 이 해안가의 작은 마을이다. 나는 여행을 갈 때 이것저것 알아보고 가기보다는 지명에,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나 사진 한 장에 끌려서 가는 편이라, 뭘 기대해야 할지도 모른 채 마을로 들어섰다.
이 바닷가의 작은 마을은 2013년에 중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와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냈던 노르웨이의 베르겐(Bergen)을 떠올리게 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에, 형형색색의 아담하고 귀여운 레고 같은 집들이 나란히 서있는 풍경을 마주한 나의 첫 반응은 당연히 '와, 너무 예쁘다.' 였으나 마을 초입에서 중심부로 걸어가면서 서서히 '엄청난 관광지' 스러운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스웨덴의 코로나 대응이 아무리 유별나다고는 하나, 여기가 스웨덴의 작은 마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꽤 많았고 그중에 여럿은 여기에 섬머 하우스가 있거나 요트를 타고 세일링을 하고 있는 스웨디시들인 것 같았다. 골목골목에는 기념품을 파는 오만가지의 작은 가게들, 해산물을 파는 식당, 아이스크림 가판대 등이 줄줄이 늘어서있었고, 나와 친구들은 어느새 관광객의 대열에 서서 펭귄처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말리의 컨텐츠를 위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우리의 사진도 몇 장 남기고 지나가는 사람들, 요트를 구경하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가 원하던 여행이 이런 거였나?' 하는 물음표가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는 어디 여행을 갈 때마다, 심지어 스웨덴에 와서 첫 3년 차까지도 뭔가를 꼭 봐야 한다, 어딘가를 가야 한다,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강박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최근에 많이 생각하게 된 부분인데, 이 강박은 소셜미디어와도 많이 연관이 되어있었던 것 같다. 내가 걸어 다니고 찰나를 살았던 이국적인 풍경을 모두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그런 생각들. 더불어 인스타그램에서 누군가가 사진으로 찍어 올린 예쁜 풍경에 나도 다녀가고 싶다는 생각들. 이런 경험들 역시 나에게 즐거움을 분명히 주지만 동시에, 여행과 삶에서 가끔은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즉흥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대만의 어디 유명하다는 곳에서 먹었던 도시락이 닭고기였는지 돼지고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으며, 제주도의 힙하다는 카페들을 갔을 때도, 그 순간에 있기보다는 순간을 담다가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그런 강박들은 즉흥적인 만남이나 순간순간의 느낌과 날 것의 감흥을 희석시킨다.
작년 10월에 갔던 오슬로, 올해 2월에 갔던 암스테르담에서는 그런 강박을 100퍼센트 버린 나를 만났고 이 여행들은 그 자체로 내 안에서 빛난다. 모든 순간에 충실했고, 우연히 다가오는 것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게 우습게도 스뫼겐의 마을산책은 이 여행 중 유일무이한 '아 이게 아닌데' 순간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인파를 벗어나 작은 새우 샌드위치를 사들고 바다가 잘 보이는 암초위에 앉아 조용한 점심을 가볍게 먹고, 스뫼겐의 자연을 보러 하이킹에 나섰다.
스뫼겐의 중심부에서 차로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는 아름다운 하이킹 트랙이 있었다. 우리는 체리나무 옆에 차를 세워두고, 5키로 코스를 걷기로 했다. 10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뜨거운 볕에서 걷던 것도 잠시, 우리는 나무가 울창한 숲 속을 걷고 있었고 잠시 길을 헤매며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봄볕에 눈이 녹듯, 자연스럽게 각자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말리가 해준 그녀의 대학교 시절 연인과의 이야기는, 진부한 표현일지라도, 너무 영화 같아서 듣는 동안 내내 감탄을 했다. 이 남자는 자신감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일상을 모험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 같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는 학교에서 만난 말리에게 "내일 오전 7시에 핫초콜렛을 들고 이 숲에 있는 이 나무 위로 올라와."라고만 말하고 휙 가버렸다. 말리는 당연히 이 남자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고 그녀 역시 아주 모험심이 강한 친구이기 때문에 정확히 아침 7시에 손수 만든 핫초콜렛을 들고 나무를 '등반'하였다고 한다.
나무 위에 올라가자, 먼저 옆에 있는 나무에 올라와 앉아있던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너에게 이 해가 뜨는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가만히 말했고 마법처럼 한 무리의 사슴 떼가 아침햇살에 반짝이며 지나가고 있었다고.
말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조금은 깊은 이야기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을 사귈 때 시간이 걸리는 편이어서 아직 조금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친구가 너무 순수하게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와 루바에 대해 궁금해하자 나도 나를 감싸고 있는 양파껍질을 한 꺼풀 벗어보기로 했다.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준 게 아니다는 문장을 올해 읽은 적이 있다. 여행을 같이 간다는 것은 그 시간을 오롯이 나를, 그리고 여행에 동반한 이들을 알아가는데 쓰기 때문에 우리는 5년간 알고 지낸 어떤 지인보다도 아주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이킹을 마치고 두 번째 밤을 보낼 마을의 이름은 '피옐박카(Fjällbacka)'. Fjäll은 산맥으로 이루어진 지형, backa는 언덕을 가리킨다. 그 이름대로 이 마을에는, 서해안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언덕이 있다. 일찍이 이 마을에서 며칠간 묵었던 말리는 우리에게도 이 석양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우리는 뷰포인트로 올라가는 길 바로 아래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들고 준산행을 시작했고, 15분 정도 계단과 암석을 번갈아 올랐을 즈음 서해안 군도의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담겨왔다.
처음 먹어본 사프란 맛 아이스크림은 내 기분처럼 잔잔하게 달콤했고, 내 옆의 두 친구는 그 누구보다 맑고 찬란했다. 우리는 한참 이 풍경을 보며 앉아있었다. 자연에 있으면 언젠간 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 나를 대차게 비웃고 싶을 정도로, 하늘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 그 안에 담긴 총천연색들의 변화, 공기와 온도의 차이는 너무 새로웠고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감각들이 하나하나 다시 눈을 뜨는 것만 같았다.
코로나로 거의 집에서만 칩거하다시피 지내던 시간이 마치 겨울잠을 자던 시간인 듯, 이 여행을 시작하고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난 느낌이 들었다. 동면을 마치고 일어난 곰이 기지개를 켜고, 햇살을 즐기고 블루베리를 찾으러 나가듯. 산뜻하고 경쾌한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