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신성한 곳, 오고이와 수르하이타
아침에 일어났는데 너무 피곤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먹었나보다. 바이칼까지 와서 조지아 와인을 굳이 사서 들이킨 나는 대체 뭘까... 여튼 어젯밤 멤버 셋이서 아침을 먹고 깔끔하게 헤어졌다.
여름의 끝자락에 올혼 섬에 머무르면서 틈날 때마다 부르한 바위 근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이 곳은 항상 바람이 세차게 분다. 사람들의 소원이 담긴 끈들이 펄럭이는 절벽에 걸터앉아 부르한 바위를 바라보면 기분이 이상하게 좋아진다. 그렇게 지내다, 마리아가 추천해 준 ‘오고이 섬’에 다녀와 보기로 했다. 가기 전까지는 난생 처음 들어 본 여기가 뭘 하는데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하나도 몰랐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배 타러 가는데 마을 언덕을 넘어가니 항구가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걸어간 후 배를 타고 오고이 섬을 향해 출발했다.
배는 작지 않았는데 승객들이 모두 러시아인이라 그들이 객실 내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동안 나는 그저 배 뒤쪽에 매달려 갈매기들이 따라오는 것을 바람맞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꼬맹이들이 주방에서 빵가루를 얻어왔는데 새우깡 대신 그걸 던지면서 노는데 철없는 나는 그걸 보며 또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간가량 바이칼 호수를 가로질러 가면 오고이 섬이 나온다. 섬에 정박해 내려온 순간 똑바로 걸을 수 없었다. 다른 세상에 온 듯 빙글빙글 두리번거리며 도대체 내가 어디에 온 건지 스스로 계속 궁금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섬의 언덕과 고요한 바이칼의 물, 그리고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강하게 부는 바람 사이에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두리번거리며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정신없이 언덕에 올라오니 저 밑으로 개미만한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세찬 바람을 뚫고 올라와 바라보는 오고이 섬은 아무것도 없는 섬의 모습만큼 내 속의 모든 스트레스와 고민을 깨끗이 비워주는 느낌이었다. 그 작은 섬은 정말 아름다웠고 나무 한 그루 없어도 사람 한 명 살지 않아도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 곳까지 오는 러시아인들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는 흰 사원같이 생긴 기념탑이 있었고, 사람들은 맨발로 주위를 돌거나 명상을 하고 있었다. 바이칼 지역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샤머니즘 문화에서 이곳은 그 중심이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잠깐 부츠를 벗고 맨발로 주위를 한 바퀴 돌아봤다. 여행을 떠나던 시기 겪고 있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나와 가족들에게 달라고 빌었다.
오고이 섬의 흰 탑은 아주아주 멀리서도 빛날 만큼 작지만 신비로웠다. 탑의 아래에는 다녀간 사람들 만큼 많은 천조각들이 하나하나 소원을 담은 채 매달려있었다.
한참 기도를 한 후 사진 좀 찍고 남쪽으로 내려가 잠깐 앉아있었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물은 코발트색과 에메랄드 색이 어우러져 풍덩 빠져들고 싶게 만들었다.
그런데 곧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평화로웠던 섬이 갑자기 폭풍의 언덕으로 바뀌어 당황한 나는 얼른 배로 돌아와서 자리잡고 앉았다. 그런데 좀 졸다가 깨서 보니 셀카봉이 없다...흘렸나보다. 소원 들어주려고 오고이 섬이 내 셀카봉을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어쩔 수 없이 그냥 앉아서 바깥 구경하고 갈매기 구경하고 졸기도 하면서 있었다. 엄청 추웠다. 여름맞나 싶었다.
추워서 객실로 들어왔다. 가이드 설명을 듣다가 부랴트족 애기랑 장난치는데 재밌었다. 애기랑 노는건 재밌다. 그 애기한테 어머니분 몰래 내가 웃긴 표정을 지으니까 (아님 그냥 웃기게 생겨서 그런걸 수도) 깔깔거리며 날 때렸다. 여튼 곧 우리는 수르하이타에 도착했다.
수르하이타는 오고이 섬과는 다른 느낌으로 이곳 사람들에게 신성한 곳이었다. 우선 도착해서 우릴 반겨준 에메랄드 빛 비치부터 나를 홀렸다. 황홀했다. 수르하이타는 바이칼 호수의 육지 쪽에 있는 지역이름인데,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 마을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건너편에 보이는 거대한 올혼 섬과 함께 다른 세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다 배가 고파졌다. 약간 어이없었지만 그런다고 허기가 가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또 뜬금없이 사람도 안 사는 이곳에 만두집이 하나 있어서 거기서 포자만두와 오물구이를 쿰척거리며 일단 먹었다. 진짜 너무맛있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숲 속으로 트레킹을 시작했다. 피톤치드 뿜뿜 마시면서 한참을 올라가니 샘물이 나왔고 역시 그것도 신성한 물이라고 했다. 두 줄기의 물이 흘러내렸는데, 모두 줄 서서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서서 차례대로 물을 받아 마시고, 손과 얼굴을 씻었다. 많은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와서 물을 받아갔는데 나는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깨끗하게 얼굴과 손을 씻고 숲 속에 잠깐 앉아 나무들 사이에서 쉬다가 다시 걸어내려왔다. 시원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돌아오면서 음악을 들었는데 참 행복했다. 이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하루하루 경험하고 싸우고 해결하고 부딪히는 현실이 아니었고, 돌멩이 하나 나무 하나 바람까지 나를 반겨주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 다른 세상 속에서 이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참 감사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즈음 쌍무지개가 눈앞에 나타났다.
물가에 돌아와 주저앉아서 계속 쉬었다. 바람과 물의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물가를 잠깐 거닐었는데, 다른 쪽에는 말 두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떠날 시간이 될 때 즈음 배에 올라타서 앉았다. 역시 따라오던 갈매기들의 현란한 몸짓을 구경하다 잠깐 졸았다. 곧 후지르에 도착했고 각자 흩어져 나는 다시 또 부르한 바위 곁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때쯤 숙소로 돌아왔다. 여기 사는 강아지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 방 밖에만 나오면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게 하루동안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오니 헤어나오기가 어려웠다. 잠깐이었지만 모든 고민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이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모두 과장한다고 비난하지만 결코 과장없이 오롯이 나 혼자 자유로웠던 날이었다. 동시에 하도 가이드가 ‘신성한 곳’이라고 귀가 닳도록 얘기해서 그런지 왠지 이상한 기운이 나를 감싸는 느낌이었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차디찬 바이칼의 물을 홀린듯이 바라봐도 마냥 행복했다.
다시 돌아가진 못할 것 같다. 다시 돌아가면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상태에서 달라지는 것이 싫다. 앞으로도 그 마음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