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디자인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과거의 자동차들을 보면 당시의 기술력과 유행에 따라 일정한 디자인 양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독 한 부분에만 동일한 디자인이 적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40년 넘게 말이다.
헤드램프가 평소에는 숨겨져 있다가 밤에만 펼쳐져 올라오는 차를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그 디자인은 한때 미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에만 적용되어 국내에서는 볼 확률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의 눈꺼풀을 연상시키는 헤드램프 디자인은 신비함을 자아내는 한편 "왜 굳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게 한다. 누가 어떤 이유로 만들었으며 왜 요즘 차에선 볼 수 없는 걸까?
미국의 까다로운 자동차 법규
전조등 규격을 통일해버렸다
람보르기니 쿤타치, 마쯔다 미아타 등 2000년대 이전 출시된 쿠페, 세단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는 일명 '팝업 헤드램프'로도 불렸다. 나름의 매력이 있어 그 시절의 디자인 유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를 스스로 원해서 탑재한 자동차 제조사는 거의 없었다.
때는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헤드램프는 어셈블리 안에 끼우는 전구 등 광원을 별도로 교체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램프와 전구가 일체형이었다. 미국 정부의 누군가는 "모든 차가 같은 헤드램프를 달면 교체 비용도 낮아지고 정비도 쉬워지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를 냈고 결국 미국 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차에 직경 7인치(약 178mm)의 표준 규격 원형 전조등 탑재를 법제화했다. 그럼 그 동그란 헤드램프를 전면부에 고정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복잡하게 팝업 형태로 만들었을까?
울며 겨자먹기로 탑재
내수형에는 적용 안 해
당시 미국 정부는 헤드램프의 규격뿐만 아니라 최소 높이까지도 규제했다. 광원이 지면으로부터 일정한 높이에 위치해야 한다는 규정은 세단, SUV 등 차종에는 별 지장이 없었으나 차고가 낮은 스포츠카 혹은 전면부가 낮은 유선형 세단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던 미국 자동차 시장을 포기할 자동차 제조사는 없었고 결국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는 미국이 요구하는 높이까지 솟아오르는 리트랙터블 램프를 적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는 미국의 규제를 충족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장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헤드램프를 올리고 내릴 복잡한 장비가 적용되며 생산 단가, 수리비가 비싸졌고 야간 고속 주행 시에는 공기 저항도 상당했다. 특히 핸들링이 중요한 스포츠카의 경우 전면부 무게가 늘면서 운전 재미를 해쳐 이만한 골칫거리가 없었다. 결국 미국 외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미국 수출형에만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를 적용하고 내수형에는 일반적인 고정형 헤드램프를 별도로 적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유일하게 적용된 국산차
기아 엘란
한편 국산차 가운데에도 리트랙터블 헤드램프가 적용된 차종이 있었다. 90년대 중반 기아가 영국 스포츠카 제조사 로터스의 라이센스를 사들여 출시한 '엘란'은 비록 영국 태생이지만 국내에서 생산되어 국산차로 분류되었다. 당시 미국 수출도 대비했던 로터스는 엘란에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를 적용했다.
파워트레인이나 일부 내장재, 오디오 등 상당 부분에 기아 부품이 들어갔지만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만큼은 로터스 협력 업체 직수입 제품이었다. 지금은 모비스에서 더 이상 수입이 안 되어 재고 부품만 소량 남아 있으며 현재 엘란을 운영 중인 오너들은 복잡한 해외 직구를 이용하는 등 부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전해진다.
장점 없는 애물단지
결국 빠르게 사라졌다
1940년 제정된 법은 1984년까지 무려 44년 세월 동안 유지되고 있었다. 그동안 이뤄진 기술 발전은 하늘과 땅 차이였고 작은 렌즈로 넓은 범위를 비출 수 있는 프로젝션 전조등이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돌출된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는 보행자 안전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강화되는 안전 규제에 따라 빠르게 퇴출되고 만다.
하지만 이후에도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를 장착한 차량이 한동안 더 출시되었는데, 페라리는 1994년 출시한 F355에 마지막으로 적용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를 탑재한 양산차는 2004년 쉐보레 콜벳 5세대(C5)로 기록되었다.
아직 남아있는 로망
윙크 튜닝 유행하기도
리트랙터블 헤드램프는 요즘 차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흔적이 되었지만 이에 대한 로망을 가진 자동차 마니아들이 많다. 이들은 일부러 리트랙터블 헤드램프가 달린 차량을 구매하거나 심지어는 부품을 가져와 이식하는 복잡한 튜닝을 단행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배선을 개조해 리트랙터블 헤드램프의 좌우를 따로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드는 튜닝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 경우 한쪽 헤드램프만 들어 올려 윙크를 하는 등 유쾌한 연출이 가능하다. 훗날 전동화 전환이 완전히 끝나 내연기관 자동차가 퇴출당한다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이 될 것이다. 혹시나 리트랙터블 헤드램프가 적용된 차량을 갖고 싶다면 서두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