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금물 플리즈
"이쪽은 기획팀 총괄하시는 애니 차장님입니다. 우리의 등대이자 정신적 지주이죠."
김모양의 첫 출근일, 소개자 역할을 맡은 정 대리는 신입사원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뜻밖이다.
'뭐? 정... 신적 지주? 언제부터? 내가 언제 그런 걸 한다 동의했남?'
총괄, 등대, 지주... 별 뜻 없는 인사말에 나는 주눅이 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신입사원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급하게 목례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내가 과연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가?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나? 흠, 전혀 아닌데...
"애니야, 우리 H가 대학 졸업한 지 한참 됐는데, 아직도 진로를 못 정했어. 넌 회사에서 팀장이라며? 네가 선배로서 조언 좀 해주련?"
지난주에 평소에 연락도 잘 하지 않는 이모가 어쩐 일로 전화를 해서는 아들내미 진로 상담을 요청했다.
'이모,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남에게 상담을 합니까, 참'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처음에 힘들어도 작은 회사에서 경력을 쌓는 것도 괜찮다 라며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매우 중요한 정보인양 잘도 건넸다. 내 입으로 내뱉은 말처럼 내 인생도 천천히 잘 흘러갈 수 있으면 차암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아함은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서른 중반쯤 되면, 누구나 알아줄 법한 작품이나 전문성 같은 걸 갖게 될 줄 알았다. 폭넓은 식견, 현실에 근거한 타당한 예술성, 그러한 능력이 당당한 카리스마로 발현되는 커리어우먼! 또각또각 프라다 하이힐 위, 곧추선 자세에서 풍기는 자신감, 캬아! 그런 아우라 말이다.
그러나 나이와 능력이 비례하진 않더라. 확실한 건 커지는 나이의 숫자와 자연스레 올라가는 위치뿐이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팩트에 근거해 아주 자연스럽게 '어른의 삶과 능력'을 팀장에게 기대한다. 기대는 희망일 뿐 꼭 사실은 아니다. 그러니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 났다고 해서 무조건 실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가장과 사장의 무게와 비애에는 주목을 하면서, 왜 팀장의 부담과 고민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뿐이어서? 세상의 다른 팀장님들은 다들 출중한가 보오.'
나도 너와 똑같아, 두려움의 노예
나는 두렵다, 새 문서를 열어 하얀 백지를 마주할 때. 깜박이는 커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에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비치는 물결의 반짝임을 떠올린다. 무엇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지, 어떤 문장으로 시작을 할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누구도 답을 주지 않는다. 일단 노를 한 번 저어보고, 첫 문장을 썼다 지웠다 해본다. 어릴 때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나는 두렵다, 회의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 난관에서 구원해주길 바라는 부하직원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할 때. 신이시여, 잡스 오라버니 발톱의 때만큼의 인사이트만이라도 내려주소서. 그러나 나도 별수 없는 범인이다. 죽어라 찾아보고, 고민하고, 상상해야 작은 기획 아이템이라도 건질 수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지만 날고 기는 삼박한 아이디어는 항상 퐁퐁 샘솟진 않는다. 노력에 투입하는 시간은 신입사원 때와 비슷한데, 스트레스 강도는 오히려 몇 배 커졌다.
리스너는 되어 줄게, 어른스럽게
초콜릿과 아이스크림만 입 속에 있으면 만사 오케이가 되는, 허구한 날 세계지도 열어놓고 여행 꿈만 꾸는, 킬리언 머피의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그의 부인에게 폭풍 질투를 하는 나는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다. 뭘 해도 서툴고, 넘어지기 일쑤다. 우주 기운 몰아주는 순실이 같은 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 싶다. 몸에 맞지 않는 어른 흉내를 내려니 언제나 퇴근 후에는 정신이 너덜너덜 난도질된다.
내 정신적 지주는 변함없이 <언니네 이발관>이다. 힘들 때, 외로울 때, 서러울 때, 기쁠 때도 <울면서 달리기>나 <인생의 별>을 들으며 위안을 받는다. 옆자리의 신입사원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충줄한 능력이야 각자 노오력을 해서 얻는 것일 테니 내가 뭘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대신 나는 언제고 등을 토닥여주는, '아량'있는 사람이면 되겠다고. 이 정도면 쵸큼은 나은 어른은 되겠지, 석원 오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