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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옥 Mar 06. 2021

우유 중독

결핍 보충제

아침에 냉장고 문을 열고 망연자실했다. 우유가 없다! 어젯밤 퇴근길에 사 왔어야 하는데, 야근 후 허둥지둥 오느라 깜박했다. 어쩔 수 없이 급하게 계란 프라이를 한 장 부쳐 급하게 먹고는 집을 나섰다. 그래도 우유 없는 아침식사는 헛헛했다. 


내 몸은 우유로 만들어졌다고 믿는 사람이다. 기운이 없거나 기분이 우울하면 우유를 마신다. 술 마시고 난 다음날 숙취가 심할 땐 코코아 가루 듬뿍 넣은 초코우유로 해장하고, 떡볶이를 먹고도 우유로 입가심을 한다. 오늘처럼 냉장고에 우유가 떨어지는 일은 드문데, 이건 꽤나 큰 일이다. 


우유 중독은 옥섭 씨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등학교 때 그녀는 매일 도시락을 싸주면서 꼭 500ml 서울우유 한 통을 넣어주었다. 내가 요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다하지도 않았다. 나는 점심밥을 다 먹고도 그 큰 통을 꿀떡꿀떡 넘겼다. 우유 덕분인가, 나는 고교 1학년 때부터 무럭무럭 컸다. 옥섭 씨와 희경 씨의 유전자 조합을 그려봤을 때 내 키가 그렇게 클 수는 없었다. 그때 급작스럽게 쑤욱 큰 흔적은 양 무릎의 튼살로 남았다. 키 작은 친구에게는 '진심을 담아' 우유를 마시라는 홍보를 했다.


왜 옥섭 씨는 그렇게 우유를 먹였을까. 우리 가족이 단칸방에 살던 시절 옆집은 슈퍼를 했다. 하루는 그 집에 사는 아이가 우유 마시는 모습을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더랬다. 그 처량한 꼴이 속상해 옥섭 씨는 나를 꾸짖었다. "남 먹는 걸 뭘 그렇게 뻔히 쳐다봐." 그녀는 홧김에 나를 살짝 밀쳤고, 나는 넘어졌다. 고꾸라지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눈 앞에 땅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부끄러움으로 마음은 땅바닥 끝까지, 한없이 추락했다. 나는 한참 뒤 일어나서도 옥섭 씨를 쳐다보지 않았다. 


우유 하면 '칼슘 보강', '영양 보충'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얀 액체는 마법과 같아서, 피와 살에 스며들고 마음에 젖어 들어 나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보충해준다고 믿는다. 옥섭 씨에게 우유란 어린 딸에게 제때 주지 못한 미안함과 서글픔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결핍과 만족은 끝이 없는 법. 한없이 보상해줘야 할 것 같아서, 매일매일 우유를 채워 주지 않았을까. 나와 옥섭 씨의 서로 다른 결핍 감정은 그렇게 연결되고 중첩된다.


난 여전히 결핍 상태인 모양이다. 이토록 우유 보충제를 끊지 못하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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