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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옥 Mar 05. 2021

달려라 옥섭 씨

엄마가 보고 싶음 달릴 거야, 두 손 꼭 쥐고!

옥섭 씨는 1954년 충북 진천군 변 씨 집안 둘째 딸로 태어나 20대 중반, 월악산 밑 제천에 사는 안희경 씨와 혼인을 했다. 몇 년 후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제천 살던 집이 수몰지구가 되어 부부는 충주시로 나왔다. 내가 세 살 되던 해였다. 둘은 연고도 없는 충주시로 들어와 고추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말린 고추며 마늘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고난한 생활이었다. 그 사이 아이가 늘어 식구는 총 다섯 명이 되었다. 단칸방에는 자개장과 티브이도 있었고, 겨울에는 연탄용 난로도 들여놔야 했다. 방 한 칸은 나날이 좁아졌다.


한 푼 두 푼 돈을 모은 부부는 몇 년 후 작지만 방 세 칸에 무려 거실까지 있는 연립주택을 장만했다. 몇 년 후에는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했고, 또 몇 년 후에는 기어이 2층짜리 건물을 샀다. 1층에 가게가 있고 2층에 집이 있는 프라이빗 주상복합이다! 그건 옥섭 씨 평생의 꿈이었다. 오늘도 부부는 그 꿈의 건물 1층 가게에서 종일 파와 마늘을 팔고, 저녁이면 2층 집으로 올라간다.


즉 시집을 온 이후부터 그녀의 억척스러운 삶은 시작됐다. 40년이 넘도록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일을 한다. 그 사이 아이 셋을 낳아 먹이고 길렀다. 부부가 똑같이 일해도 출산과 양육, 집안일은 99 퍼센트 엄마 몫이다. 옥섭 씨는 장사를 하다가 밥때가 되면 집에서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이 삶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옥섭 씨를 보면 하니가 생각난다. 만화 <달려라 하니>의 깡다구 센 주인공 말이다. 하니처럼 얼굴을 감싸는 짧은 반곱슬 머리가 평생 변함없고, 몸매가 다부지다. 150cm가 될까 말까 한 작달막한 키에 몸집도 작고 발도 앙증맞다. 그래도 어디 하나 굽은 곳 없이 올곧다. 당찬 면모도 하니와 닮았다. 주눅 들지 않고 언제나 하고자 하는 바 척척 착착 참 잘도 해낸다. 나는 그녀로부터 주어진 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항상 느꼈다.


요즘 유난히 옥섭 씨의 그 억척스럽고 강인한 삶의 태도를 떠올린다. '그녀는 어떻게 버텼을까', '어떤 각오로 그 풍파를 견뎠나', '꿈에 그리던 2층 집을 계약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실은, 나는 오늘도 여러 번 주저앉았다. 뭐라도 써내야 하는 모니터의 백지를 마주하고, 빨리 해내야 하는 강박에 부딪히며 '더 이상 할 수 없다', 속으로 수십 번 무너졌다. 옥섭 씨 나이가 되면, 나도 그녀처럼 강인한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쉼 없는 뜀박질을 하기엔 내 심장은 아직도 너무 여리다. 하아...., 하아...., 한숨 쉬는 횟수가 백 번이 넘어가기 전에 굳이 이 글을 쓴다. 옥섭 씨가 평생 보여 준 '하니스러움'이 필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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