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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옥 Mar 08. 2021

침묵했던 가족의 언어

이제야 말합니다, 미안해요

 "실은 일주일 전에 할머니 돌아가셨어. 너 멀리서 괜히 걱정할까 봐 지난번에 얘기 안 했다. 장례식도 다 간소하게 잘 끝내고, 절에 모셨다."


삼 개월 간의 인도 여행을 끝내고 유유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리무진 버스를 기다리며 옥섭 씨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잘 돌아왔다 보고 하는데, 느닷없이 할머니는 잘 돌아가셨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 직계 가족의 부고를 그녀는 남의 가정사 얘기하듯 덤덤히 전했다. "아니 엄마는 그런 걸 어떻게 지금 이렇게 알려 줘?"라고 언성을 높였지만, 내 목소리는 곧 정차하는 공항버스 엔진 소리에 묻혔다. 서울로 들어오는 공항버스 안에서 내내 먹먹했다. 벌써 십오륙 년 전 일이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생 때 우리 집으로 오셨다. 혼자 사시다 치매 판정을 받아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집이 점점 커가는 시기여서 할머니 방을 따로 마련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합류, 그로부터 집안에는 단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다.


할머니와 옥섭 씨는 원래 사이도 안 좋았는데, 한 집안에 있으니 매일 언성 높이는 일이 벌어졌다. 옥섭 씨는 변함없이 장삿일과 우리 먹이는 일로도 바빴는데, 이제 할머니 수발까지 들어야 했다. 할머니는 서운한 게 있으면 동네에 떠들고 다녔다. 동네는 옥섭 씨의 구역이니 누구도 옥섭 씨를 비난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런 말이 밖에서 들려오면 반드시 할머니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고도 할머니 밥상을 차려 올리는 일은 잊지 않았다.


평화롭던 집안에 시시각각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지니, 할머니는 나에게 원흉이었다. 이전에도 살가운 손녀는 아니었지만,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시고 난 뒤부터 나는 할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하다시피 했다. 나는 그저 하루빨리 대학을 가서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떠나기만을 바랐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 할머니 장례식 때 옥섭 씨는 세상 떠나가라 펑펑 울었다고 한다. 삼촌과 고모 등 누구도 그러지 않았는데, 평생 시달리고 힘들어했던 옥섭 씨는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옥섭 씨는 할머니 보양식으로 매일같이 끓여냈던 인삼 소고깃국을 이제 나를 위해 대접한다.


영화 <미나리>를 봤다. 감독이 불러낸 할머니의 기억이 내 기억도 소환했다. 영화를 보면서 잊고 있던 우리 할머니의 냄새와 말투를 떠올렸다. 그 시절, 할머니는 외로웠고, 옥섭 씨는 서러웠다. 나는 둘 모두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그 말을 못 했다. 우리 가족의 언어는 없었다. 침묵은 오해를 불렀고 우리는 멀어졌다. 그런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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