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기옥 Mar 09. 2021

지갑에는 발이 달렸다

세 살 버릇 길러 준 건 옥섭 씨

코트를 착 챙겨 입고, 마스크와 헤드폰도 착착 얼굴에 장착했다. 휴대폰도 있고, 지갑이..., 지갑은 없다! 가방 속에도 없고 책상에도 없고, 책상 밑과 소파 아래도 봤는데, 없다! 혹시나 해서 어제 입었던 코트 주머니를 뒤져보았어도 없었다. 대체 어디 간 거야. 결국 메고 있던 가방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굴러다니는 맥주캔 사이도, 널브러진 침대 이불 속도 헤집었다. 그렇게 한참 난리를 치다가 결국 둘둘 말아 던져둔 요가매트 위에서 발견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이미 나가려던 시간보다 15분이 지났다.


난 정말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다. 사무실 책상도 집만큼 난장판이다. 가끔 청소를 해도, 깨끗한 상태의 유효기간은 채 하루를 못 넘긴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평소에는 문제인지 모르지만, 오늘 아침처럼 뭘 잃어버리고 생각이 안 나면 미치고 팔짝 뛴다. 심지어 이런 일이 매우 잦다. 서류도 어느 폴더에 뭐가 있는지 몰라서 내 팀원의 첫 번째 임무는 무조건 서류 정리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이 정리 못하는 버릇은 옥섭 씨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녀도 항상 바깥 일로 바쁘니, 집안은 늘 너저분했다. 당장 먹고 살기 빠듯한데 정리와 청소 따위를 할 시간이 어딨나. 더군다나 흙 묻은 채소를 취급하는 부부의 직업상 여기저기 흙먼지 떨어지는 건 예사다. 가끔 방바닥은 청소기 돌리면 되지만 티브이 위, 창틀 및 창가, 책장이나 선반 위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청소를 못한다. 지금도 충주 집은 여기저기 먼지 더께가 앉아있다. 볼 때마다 씁쓸하지만, 또 그러려니 한다.


정리 못하는 습관이 부모 교육에서 비롯됐다는 지점을 짚어 준 건 우리 회사 사장님이다. 사장님은 내 책상이 항상 상상 이상으로 지저분해서 입사 초기 여러 번 지적을 하셨는데 나중엔 '그렇게 자랐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셨다. 바뀌지 않을 걸 아신 뒤에는 잔소리 대신, 자리를 가장 구석에 배치해 주셨다. 회사에 오는 손님들에게 보이기가 부끄럽단다. 나는 여전히 그 배려가 고맙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책상 왼쪽엔 맥주 캔이 굴러가고 오른쪽엔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책과 서류가 쌓여 있다. 머리에는 당장 내일 할 일 목록이 켜켜이 집을 지었다. 물론 그 리스트에 청소가 낄 틈은 없다. 언젠가는 <행복이 가득한 집>에 나오는 완벽히 정리되고 깨끗한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우리 가족이 옥섭 씨 꿈을 따라 2층 집으로 이사 갈 때, 나는 어쩌면 우리도 그런 '럭셔리'한 삶이 가능하겠다 낙관했다. 그러나, 곧, 눈 앞에 할 일이 쌓인 이들은 집안의 먼지도 쌓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다시 말해서 내가 정리 못한 사람이 된 건 다 어쩔 수 없다는 거다. 할 일이 많은 탓, 옥섭 씨가 그렇게 보여 준 탓이다, 에헴.

이전 08화 침묵했던 가족의 언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