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기름으로도 낼 수 없는 신비의 맛
세종시에 출장을 갔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여행 가듯 마음이 가벼웠다. KTX가 서울을 떠나 한가한 시골 풍경을 초단위로 펼쳐 보였다. 빈 들에 햇살이 가득하다. 지나쳐 보는 것만으로도 춘삼월 따뜻한 땅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객실 모니터에 봄철 나물에 관한 영상이 떴다. 달래, 냉이 철이 왔단다. 자연스레 옥섭 씨가 차려 준 밥상이 떠올랐다.
바다 냄새 한 올 맡을 수 없는 한반도 내륙에서 자란 덕에 바닷 생물은 거의 못 먹어도, 나물은 매일 같이 먹었다. 옥섭 씨는 고사리 잔뜩 넣은 육개장을 한 솥씩 끓여 며칠씩 우리를 먹였다. 콩나물, 시금치 무침이야 예사고, 씀바귀, 고들빼기 같은 '어른 음식'도 자주 무쳐냈다. 봄에는 냉이 된장국을 자주 올렸고, 가을에는 월악산 친척과 지인들이 보내 준 이름도 모를 각종 희귀한 버섯을 볶음이며 찌개로 상에 내었다. 나는 옥섭 씨가 그 재료도 생소한 걸 어떻게 딱딱 꼭 맞는 레시피로 요리를 해내는지 감탄했다. 매번 배불리 먹었다.
자취 생활을 하면서 나물 반찬을 먹기는 참 어렵다. 사시사철 가장 구하기 쉬운 시금치 무침을 몇 번 시도해봤다. 옥섭 씨에게 시금치는 몇 분 동안 데치면 되는지, 뭘 얼마나 넣으면 되는지 물었다. 끓는 물에 살짝 넣다 빼서, 간장, 참기름, 마늘 조금 넣으면 된단다. 그런데 몇 번을 해봐도 옥섭 씨의 맛이 나지 않는다. 찌개나 볶음은 어찌어찌 흉내를 내도, 나물무침만큼은 옥섭 씨의 손맛을 낼 수 없었다.
시금치 무침은 사실 옥섭 씨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마트에서 사 온 시금치를 깨끗하게 씻고(특히 뿌리 부분에 흙이 많아 세심하게 씻어야 한다), 끓는 물에 잠깐 데쳐야 한다. 그걸 또 식혀서 물기를 꼭 짜야한다. 그 뒤에 몇몇 재료를 넣어 간을 맞춘다. 이 과정은 아무리 빨라도 이삼십 분은 걸린다. 시금치 무침 하나 먹자고 이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건 과하다. 심지어 맛도 없으니, 자연스레 안 하게 됐다.
나물 요리의 번거로움과 맛의 신비를 깨달으면서 옥섭 씨 밥상의 한 없는 정성을 이해했다. 나는 그렇게 맛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땐 이렇게 쓴 걸 왜 반찬으로 먹나 의아했던 씀바귀가 이제는 가장 좋아하는 나물이다. 그런데 씀바귀는 어디서 쉽게 사지도 못하는 것이라, 충주에 가면 꼭 한 통씩 얻어온다.
콩가루 듬뿍 넣어 끓인 옥섭 씨의 냉잇국이 간절한 날이다.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