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기옥 Mar 24. 2021

사치에 대하여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사고 싶다! 사야겠다!

"나도 저거 하나 있으면 좋겠네."


우리가 이층 집으로 이사 오고 난 후 몇 달 뒤였다. 티브이 홈쇼핑에서 쇼호스트가 열심히 모피 코트를 팔고 있었다. 옥섭 씨가 모피 코트를 갖고 싶다고? 소유욕이야 인간 본성이니까 아무리 사치 안 하고 살아온 옥섭 씨도 '갖고 싶다'는 마음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이 금목걸이나 명품 가방도 아니라 굳이 모피 코트라는 점은 의아했다. 그것은 골프만큼이나 우리네 생활과 일말의 교집합도 없는 딴 세상 물건 아닌가. 그건 상류층 '파티 피플'이 호텔에서 샴페인 마실 때 입는 옷이라 생각했다. 충주시 시골 동네에 사는 우리는 호텔도 안 가고 샴페인도 안 마시는데, 무슨 용도로 갖고 싶을까? 


어쨌든 얼마 후 옥섭 씨는 진짜로 모피 코트 한 벌을 장만했다. 그나마 쇼호스트가 자랑하는 우락부락 화려한 디자인이 아니라, 외피에 가죽을 덧대어 차분하게 떨어지는 핏이었다. 체구 작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엄마 어때? 괜찮지?"


옥섭 씨가 코트를 입고 거울 앞에서 연실 이리저리 비춰봤다. 만족스럽고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예상대로 모피 코트를 입을 일은 많지 않았다. 누군가의 결혼식이었나, 옥섭 씨가 어떤 행사에서 두어 번 입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지지고 볶는 밥벌이'로 점철된 삶에서 우리는 파티를 할 여유도, 경험도 없었다. 그 코트는 여전히 그녀의 옷장에 있을까.


지난 주말 오랜만에 대대적인 집 청소를 했다. 쌓아 둔 옷더미 속에서 우쿨렐레를,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책장 뒤에 숨어있던 기타를 재발견했다. 피아노에 여전히 소리가 나나 생사 확인을 했고, 작년 여름에 들여와 두세 번 뚝딱 거리고 방치한 전자드럼도 몇 달만에 전원 연결을 해보았다. 


누가 보면 전문 음악가라 생각할 정도로 나는 갖가지 악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 하나 제대로 연주할 줄 모른다. 미남 선생님께 기타를 몇 달이나 배웠어도 F코드 잡는 게 어려워 포기했고, 피아노 레슨을 몇 년이나 했는데 양손, 열 손가락을 동시에 따로 움직여야 한다는 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매년 새로운 악기를 샀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언젠간 내 음악을 하고 싶었다. 악기를 사면, 나의 열정이면, 금세 그 꿈이 이뤄질 줄 알았다. 그건 판타지였다. 악기를 연주하는 능력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옥섭 씨처럼 워라밸은 언감생심 꿈꾸기 힘든 나날을 보내는 나에게 악기 연습은 늘 뒷전이기 마련이다. 결국 악기는 방치되고, 해소되지 못한 음악에의 갈망은 손쉬운 '다른 악기 소비'로 이어졌다. 사물을 사는 것이 능력과 경험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배우는 데 십 수년이 걸렸다. 가야금도 한 대 사야겠다는 생각을 그래서 접었다.


옥섭 씨는 모피 코트를 사면 저녁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가 사모님처럼 멋지고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지 모른다. 럭셔리 라이프의 욕망을 어떻게든 실행하고 싶었을 터다. 옥섭 씨나 나나 이제 얼마간의 소비로 원하는 가치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 또한 슬프다. 이제 애초에 불가능한 걸 아니까, 욕망은 영원히 꿈으로만 남아야 하는 걸까.  


옥섭 씨가 더 이상 '이걸 사도 괜찮을까' 망설이지 않고 맘껏 사치를 부려봤으면 좋겠다. 그럴 때 나도 가야금을 지를 수 있겠다. 무엇보다 우리가 노동을 그만 좋겠다. 그건 진짜 꿈이려나.

이전 22화 대화의 기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