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불안에 대한 소고
인도, 무릉도원 고아에서 미지의 도시 함피 가는 길
어스름 차창밖으로 빨간 태양 자락이 보일락 말락 하더니,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곧 세상이 옅은 주황빛으로 물들며 환해졌다. 돌부리가 절반인 반포장도로를, 낡은 버스는 덜컹거리며 밤새 잘도 달렸다. 비좁은 자리에서 내 몸뚱이만 한 짐을 껴안고 밤새 뒤척이느라 마라톤 완주를 달성한 것보다 더 녹초가 됐다. 실눈으로 조심스레 두리번거렸더니, 옆자리 인도인 아저씨가 매우 친근하게 굿모닝 인사를 한다. 아, 그렇지, 여긴 인도지. 이 나라에 당도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는데도 아침마다 생경함이 완고하게 다가온다. 낯선 현실이 귀찮아져서 애써 눈을 감았다. 찌뿌둥한 어깻죽지와 등짝의 미약한 고통을 느끼며, 쓴 입맛을 억지로 삼키며 몇 초간의 혼몽을 즐기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고자 하는 의식 자체가 이미 각성의 시작이다. 이미 초조함이 발동됐다. 곧 버스는 정차를 한다, 곧 나는 내려야 한다. 이름만 아는 함피, 거기는 어떤 곳일까?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하아, 오늘 당장 맘 편히 아침 요기를 할 곳이 있을까?
'먼저 숙소를 정할 것, 낯선 놈은 경계할 것, 불안함을 내보이지 말 것.'
콩콩대는 심장을 잠시 진정하고 잊어선 안될 항목들을 읊조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더듬어 여권과 돈을 확인했다. 다 제자리에 있다..., 괜찮다..., 괜찮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선 다시 낯선 곳, 나는 다시 혼자다.
여행을 시작할 때도, 삶을 다시 시작할 때도 우리는 불안하다!
배낭여행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생각할 때마다 고아에서 함피로 가는 버스를 떠올리게 된다. 함피는 여행객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다. 그런데도 나는 무슨 배짱인지 그 어떤 사전 지식도 없이 즉흥적으로 그곳을 다음 행선지로 결정했다. 밤새 달려갈 그 버스에 외국인도, 여자도 나 혼자였다. 가방을 부둥켜안는 것으로 극도의 불안함을 달랬지만 내 동공은 밤새 떨렸고, 심장은 쉴 새 없이 롤러코스터 타 듯했다.
함피는 조금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두려움과 외로움은 혼자 하는 배낭여행을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이다. 공항에서 나올 때, 기차와 버스에서 내릴 때, 새로운 도시에 당도했을 때, 그 출발점마다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의 흥분 상태가 된다. 낯선 말소리, 이국적인 냄새, 나만 보는 것 같은 시선.... 어쩐지 따뜻하지 않고, 어쩐지 누구 하나 나를 반기는 것 같지 않은, 나 자신이 철저히 이방인이 되는 그 시작의 순간! 나는 너무 외롭고, 일순 갈 길을 잃는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같은 상황이 된다. 나의 조국이되 여행으로 이미 달라진 내 시선으로선 전과 똑같지 않은 나라, 무소속인 나의 상태, 빈털터리, 엄마품 말고는 갈 곳 없음. 여기에 앞으로의 밥벌이에 대한 실제적인 걱정이 더해진다. 턱까지 차오르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옥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또다시 낯선 곳에서 또 외로운 자신이 되는 아이러니.
익숙해지고, 어떤 것은 멀어지고, 그렇게 새로워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우리는 또 길을 떠난다. 오롯이 혼자인 상황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을 가장 깊고 충실히 볼 수 있다. 길 위에서 만나는 나와 같은 외로운 존재들과도 평등하게 대화할 수 있다- 똑같은 우린 여행자이니까. 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영혼들과의 만남과 찰나적 이해, 불안함을 녹여줄 생경한 길의 익숙해짐 그 과정과 경험이 좋아서 그렇게도 귀찮고 피곤한 짐싸기를 마다하지 않는 거다.
외로운 길을 걷고 달리다 보면 갖은 상념이 차오른다. 낯 뜨겁게 부끄러웠던 일, 너와의 비밀스러운 대화, 예전 여행의 기억, 다음 행선지에 대한 상상, 몇 년 뒤 오픈할 술집 인테리어 등 내 과거와 미래에 대해 몇 권의 소설을 쓰게 된다. 그럼 어떤 익숙한 생각들이 사라지고, 어떤 익숙한 것은 조금 남게 되고, 나는 그 연약한 실마리를 잡고 이후 조금은 새로운 길을 낼 수 있다.
사실 이 글은 나 자신에게 확신이 필요해서 쓰게 됐다. 추석날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인 훈훈한 자리, 나는 슬슬 홀로 떠나게 될 여행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속으로 자꾸 묻고 있었다. 남미 여행 계획이 잘 한 결정인지. 이렇게 대책 없이 또 길을 떠나도 되는지. 다시 처절하게 외로워질 준비가 되어 있는 건지. 나약한 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돌아본다. 다행히 결심이 확고해졌다. 떠나자,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