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회생활 30여 년을 넘게 하면서 직업과 관련하여 세 번의 선택을 했다. 회사원, 대학 강사, 그리고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님이 그것이다.
나의 세 가지 직업을 하나로 꿰게 만드는 keyword는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본다.
교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부모님의 뜻을 굳이 어겨가면서까지 나는 고향을 떠나 스물일곱 살 되던 해에 서울의 회사에 취직을 했다. 교사라는 직업이 싫거나, 나빠서가 아니었다. 1980년대 그 시절에는 여성에게 교사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질문이 있었다. 왜 여성은 교사만을 선택해야 하는지. 교사 외에 다른 직업의 세계는 어떠한지.
전공이 영문학이었으므로 회사에서 영어교재 원고를 쓰는 일을 했다. 대학 1학년에 만난 첫사랑과 젊음 하나로만 결혼을 했다. 우리는 가난했으므로 때로는 회사를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에도 참아야 했다. 누군가 얘기한 대로 월급은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마약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흔 즈음에 내 집 마련하느라 생긴 빚을 다 청산하면서 다시 질문이라고 할까 혹은 양심의 가책이라고 할까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마음에 요동이 생겼다. 그것은 나의 전공에 관한 것이었다. 전공이 영문학이어서 교육과는 상관없는데 학생들 영어 교재 원고를 써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이 마음속에 떠올랐을 때는 2000년대 초반 TESOL이 사회 전반을 휩쓸 무렵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도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든다.
이 무렵부터인가 보다. 학교에 그렇게 다시 가고 싶었다. 밤이면 늘 학교 가는 꿈을 꾸었다. 어느 날 밤에는 학교 도서관에, 어느 날 밤은 강의실에, 또 어느 밤은 학교 연구실에 가 있었다. 간절히 원했더니, 하늘도 알아보았는지 나에게 그 길을 안내해 주는 학교 선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 도움을 받아서 영어교육 관련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학이 확정되고 나는 다시 꿈을 꾸었다. 크고, 길쭉하고, 힘차게 퍼득거리는 물고기를 내 손에 넣는 꿈이었다.
영어교육을 공부해서 영어 교재를 잘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학원에 들어갔고, 마흔다섯에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교수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불렸지만, 현실은 돈을 별로 못 벌고, 늘 위치가 불안정한 대학 강사 생활을 14년간 했다. 강의를 하면서 물론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들도 있었지만 내 마음 깊이에는 열등감이 가득했다. 영어교육의 기준은 항상 “native speaker”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국인이 어떻게 원어민처럼 되겠는가.
이 시간들이 쌓이면서 나는 어느새 다시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차라리 내가 원어민이 되어야겠다!’ 이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교원 시험을 보고 한국어 선생님이 되어 나이 쉰하고도 다섯에 베트남에까지 갔다.
다시 한번 나에게 질문한다. 3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 가지 직업을 선택하게 한 동력, 키워드는 무엇인가?
뭐니 뭐니 해도 머니, '돈'이었다. 그러나 단지 '돈'만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또 다른 키워드를 하나 더 하자면 “살면서 맞닥뜨리는 질문, 혹은 문제에 대한 나의 응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혼 초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적인 측면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집안 경제의 상당 부분을 남편과 함께 책임졌고, 남편 혼자 벌어도 가정 경제가 어느 정도 돌아간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강사 시절에도 가정 경제 전체는 아니지만, 최소한 나의 생활은 내가 책임졌다. 그리고 적은 액수이긴 하지만 조기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가 되면서 나는 비로소 일에서 자유로워졌다.
첫 번째 직업 선택을 할 때는 교사 외의 직업의 세계는 어떠한가에 대해서 질문을 가지고 회사 생활을 했다. 그다음에는 ‘좋은 영어 교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영어 전공자로서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된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원어민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열정으로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이런 선택은 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경험에 한정된 것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회사 생활이 교사보다 더 좋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강사 생활을 할 때는 영어교재에 대한 열정이 이미 식었고 ‘좋은 교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했다는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원어민 선생님이 되겠다는 열정으로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지만 막상 한국어 선생님이 되어 일을 해 보니 쉬운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가르쳐야 하는 일에 지치기도 하고, 젊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일하는 어려움도 있어서 4년 하고 난 뒤에는 더해야겠다는 열정이 사라졌다.
그 순간의 질문,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걸 깨닫고 보니 그 질문들이 당시에는 절실했지만 인생의 본질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인생의 경로를 이리저리 바꾸는 동안 나의 회사 동료 중에는 여성으로서 임원까지 올라간 이도 있다. 또 나의 대학원 동료 중에는 지금도 대학에서 계속 강의하고 있는 친구도 있다. 물론 그들보다 나는 가난했다. 또한 그들처럼 끝까지 하나의 길을 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보면 나는 실패한 인생인 셈이다.
그러면 나에게서 절반의 성공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왜 절반은 성공했다고 주장하나?
비록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경제적 독립을 어느 정도 끝까지 지켜내었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또한 질문을 했다고해서 거기에 답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 나는 대단한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실천을 했다.
그리고 인생의 경로를 바꾸는 과정에서 보다 풍성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도 성공에 해당되겠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만약에 일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돈이 결혼 초기부터 있었더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만약 내가 돈이 있어서 첫 번째 회사를 14년 동안 참고 버티며 다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나의 경우에는 회사 생활이 디딤돌이 되어 그다음의 세계, 학문의 세계가 열렸다. 회사 생활의 인내와 인간관계가 밑거름이 되어 대학원에서 논문도 쓸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학교 생활 중에서 단연코 나이 마흔이 넘어 시작한 학창 시절이 가장 즐거웠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 선생님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쉰 중반이 넘은 나이에 비교적 수월하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불안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꾸준히 강의했던 덕이었다.
소심한 내가 인생길에서 두 번이나 과감한 선택을 한 것에는 남편의 적극적인 응원이 있었다. 시어머니의 '무심히 봐 넘김'이 있었다. 여기에 더불어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연처럼 만난 이들이 결정적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드라마 같은 일들이 있었다.
과거는 나에게 사람을 남겼고, 습관을 남겼다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미국인 친구, 베트남 친구와 같은 외국 친구들과도 깊은 교류를 나누게 되었다. 30년이 넘은 회사 친구들과는 지금도 한 주에 한번 온라인으로 만나 함께 책을 읽는다. 이들과 함께 한 덕분에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울긋불긋 다채롭게 되었다
또한 늘 뭔가를 써 온 인생이었다. 회사에서는 영어교재를 썼고, 학교에서는 논문을 썼기 때문에 쓰는 습관이 붙었다. 그래서 지금 분야는 다르지만 브런치에서 에세이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인생의 가을이다. 길을 가기에 좋은 계절이다. 그리고 인생길에 질문은 항상 생긴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애써며 살아온 나는 요즈음 또다시 새로운 질문을 만났고, 이에 응답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시도가 언젠가는 또 다른 이야기보따리가 되어서 이곳에서 펼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