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독립 만세!

by 은연중애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그와 관련된 어떤 체계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생물학적 성별인 ‘여자’는 사회적인 성,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여성에게 ‘주부’, ‘엄마’라는 타이틀이 얹어질 때 그러하다.


친척분들이나 남편이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식재료를 보내오시거나, 선물할 때가 있다. 그들은 주부는, 더욱이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주부는 요리를 잘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요리하는 것에 관심이 없고 먹는 것은 뭐든지 잘 먹는다. 별히 뭐가 맛있고, 먹고 싶고 그런 취향은 없는 편이다.

이런 것을 알리 없는 친척분들이 이런저런 식재료들을 보내오신다. 고추 이파리, 쪽파, 무청......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시들어버리거나 혹은 안 그래도 비좁은 냉동실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농산물들이다. 때로는 비싼 식재료도 온다. 더덕이다. 그러나 더덕은 껍질을 벗기는 것이 고난도의 일이다.


퇴직하여 농사를 짓는 남편 친구는 해마다 커다란 늙은 호박과 고추 등을 보내온다. 내 머리의 세 배가 되는 크기의 늙은 호박이 부엌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나를 압박한다.


게다가 남편이 코다리찜이 먹고 싶다고 코다리를 사서 베란다 빨랫대 천장에 높이 매달아 놓았다. 기다란 코다리들을 담아낼 수 있는 큰 냄비부터 수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 막막하다. 코다리 눈이 나를 노려보는 것 같다.


모두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귀한 식재료를 보내주신다.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화도 내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모든 식재료들이 때맞춰 처리하지 못하면 폭발하는 시한폭탄같이 느껴진다. 이것들을 제때 손질하지 않아서 상하게 되면 나는 자신을 ‘게으른 여자’라고 얼마나 자책할 것인가.


요리를 하기 싫어하는 것에 비해 요리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고 살았다는 것은 신기하다고 할만하다. 내가 요리한 음식들을 먹은 사람들은 맛있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 친절한 인터넷 가이드 덕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접하지 않는 식재료를 보면 마치 한 번도 요리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너무나 새롭고,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전에 했던 요리 방법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머릿속이 하얗다.


곧 추석이 다가온다.

이제 환갑도 지난 확실한 60대인데 추석을 계기로 그동안 숨겨왔던 나의 개성 혹은 본성(?)을 드러내도 크게 흠이 되지는 않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디에서부터 커밍아웃할 것인가?


내가 원하지 않는 식재료를 보내주셔서 처리 곤란을 느끼게 하시는 형님, 아주버님에게 할 것인가?

“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재료를 주시지 말고 완성된 음식을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그러나 이 말을 하는 것은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자주 보는 사이도 아니고, 어쨌든 나를 위해서 좋은 마음으로 보내시는 것 아닌가. 더욱이 남편이 깜짝 놀라며 나를 막아설 것 같다.


당신이 드시다가 남은 음식을 버리는 대신 늘 나에게 막무가내로 들이미시는 시어머니께 진실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용기를 낼까?

“어머니! 제발 남은 것 저 주지 마시고 어머니한테도 맛있는 것을 저에게 주세요!’

이것도 안 될 것 같다. 이미 여러 번 얘기했지만, 어머니는 절대 기억 못 하시고, 늘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신다.


젊은 며느리에게 말하는 것은 좀 쉬울 것 같다. 며느리가 잘 이해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 O O 엄마. 나는 이제부터 김치 사 먹기로 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너희들도 김치 사 먹어야 할 것 같다 (아....... 실망하는 표정이면 어떡하지? 살짝 걱정이 된다). 그리고 이제 추석에 너희들도 음식을 조금 해오면 어떠냐? 너희 남편이랑 같이 해봐라. 음식 품목은 너희들이 원하는 것으로 정하면 돼.”


이 말을 할 용기도 필요하지만 '아들이 중간에서 한마디 끼어들어 나의 계획을 파토내지 않아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지나간다.


가정주부의 일은 성직자와 닮아있다. 딱히 세상의 인정은 받지 못하면서, ‘사랑’이란 이름 하에 참고 감내해야 할 것이 많다. 이제는 사회가 씌워준 가면을 조금씩 벗는 시도를 하고 싶다.


나이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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