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하여 나이 60 언저리에 있는 여섯 명의 여인네들과 한풀이를 할 기회가 있었다.
자식으로 인한 고통, 남편으로 인한 고통, 60여 년 묵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은 배설되지 못했던 변이 나올 때처럼 묵직했고 고통스러웠다. 타인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데 마치 자기 이야기인 것처럼 함께 울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놀랍다면 놀랍다고 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중년 여성들의 마음에 아직도 부모님에 대한 불만 혹은 원망 한 자락이 깊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나이 60줄에 들어섰는데도!
A는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가 옷 하나 입는 것까지 마음대로 못 할 정도로 간섭을 심하게 하셨던 것을 가슴 아프게 회고했다. B는 어린 시절에 똑똑한 동생과 끊임없이 비교했던 어머니가 구십 세가 다 되신 지금도 여전히 욕까지 하며 동생과 비교해서 괴롭다고 했다. C는 알코올 중독 어머니 때문에 엄마 없는 아침을 항상 보냈다며, 엄마가 “밥 먹으라”라고 부르는 친구가 제일 부러웠다고 했다. D는 장녀로서 엄마 대신에 동생들을 평생 건사해야 했다고 넋두리를 했다. E는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하면 팔자 사나워진다고 부모님이 공부를 안 시켜준 한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죄송스럽게도 이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인생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벼워졌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친정 부모님에게 마음속에 불만이 있었다.
그 시절 나의 부모님은 많이 배운 분이 아니었고, 어린아이에게 상냥하게 웃어주는 분도 아니었고, 말을 차근차근 알아듣게 얘기해 주시는 분도 아니었다. 무뚝뚝하고 엄하신 분이었다.
나는 형제 많은 집안의 막내여서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남들과 비교하면 거의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초등학교 시절 누군가가 “너희 아버지 나이 많으시지?” 하는 말이 그렇게 부끄럽고 힘들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문득문득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한 동창들 생각을 하곤 했다. 성적으로만 보면 그들보다 내가 한 끗 높았는데 ‘그때 서울로 갔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아쉬움을 부모님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가정 내의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 ‘자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님으로부터 ‘성실한 사랑’, ‘져 주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70년대에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우리들은 아들과 딸의 차별, 형제 순서에 따른 차별을 심하게 겪으며 자란 세대이다. 그런데 나는 딸로서 불이익을 받은 기억이 없다. 오히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였기에 장남, 장녀들이 떠맡게 되는 책임이나, 지나친 기대, 차남, 차녀들이 아래위 샌드위치로 끼어서 받는 서러움이 없었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는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책임이나 기대에서 자유했다. 이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제야 깨달았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가 집에 안 계셔서 불안했던 기억이 없다. 어머니는 항상 그 자리에 계셨다. 늘 똑같은 반찬이어서 힘들었다. 그때는 이것만 보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꼬박꼬박 밥 해주셨고 형제들의 그 많은 도시락을 싸주셨다. 어머니의 성실한 사랑이 이제야 보인다.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었다. 옷을 사러 장에 가면 어떤 옷이든 내가 고르는 옷을 아무런 반대 없이 그대로 사주셨다. 지금 돌아보면 어린아이가 입을 만한 옷이 아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무대 위의 백댄스가 입는 것 같은 분위기의 옷이라고 할까. 나는 어린 시절 내 뜻대로 옷을 고를 수 있었고 이러한 경험은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버지는 손녀 같은 막내딸의 생떼를 다 받아주셨다. 1970년대 초 그 시절의 아버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아마 나를 통해 처음 알게 되셨을 것이다. 우연히 바이올린을 접하게 된 나는 울고불고 떼를 써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심지어 그 귀한 바이올린을 사자마자 바로 다음날 활을 부러뜨렸다. 밥 안 먹고 이불 뒤집어쓰고 울고 나니 아버지가 다시 활을 사주셨다. 나의 아버지는 험한 인생을 사셨다. 12살에 아버지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때부터 평생 가장으로 사시면서, 학교 문턱도 안 넘으신 분이셨는데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아주셨나! 덕분에 나는 지금도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닌 특이한 아이로 동창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 시절에는 공부를 잘하면 여자상업고등학교에 가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최고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도 나에게 여상에 가라고 하셨다. 내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었다. 기어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고, 대학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졌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이 소개해 주신 선 자리에 나온 남자들을 물리치고, 대학 1학년 3월에 만난, 돈 없는, 남자와 결혼해 내고야 말았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아버지가 다시 졌다.
내 뜻대로 인생을 살았다는 것과 인생에 성공했다는 것과는 다르다. 객관적으로 보면 부모님 뜻대로 일찍이 여상에 들어갔더라면 훨씬 빨리 안정된 인생을 살 수 있었을 수도 있었다. 부모님이 소개해 주는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내 인생은 더 편했을 수도 있다.
부모님 뜻을 따르지 않고 내가 선택한 남자와 결혼한 덕분에 가정과 직장 생활 사이를 퐁당퐁당 오고가며, 조바심치며 30여 년을 살았다. 선택에 책임지는 삶을 사느라 허덕이는 인생이었다.
이 나이쯤에 이르면 마음의 상처, 한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게는 적어도 허한(虛恨)은 크게 없다. 虛恨.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인생, 남의 기준에 맞는 인생을 살아서 생기는 허허로운 마음이 虛恨이란다. 고생은 했으나 내 인생을 힘껏 최선을 다해 살아내었다는 자부심이 있다. 부모님의 성실한 사랑, 자식에게 져 주는 사랑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십 년 세월 그분들은 당신들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식을 사랑했다. 그러나 자식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대신에 부모로 인해 힘들었던 것은 아주 오랫동안, 늙어서도 잊지 않는다.
이제야 그분들의 사랑이 보인다. 나는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