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칸의 드레스코드에는 맛대맛이 답이다 이 말이야
지난 6일, 역사상 첫 7월의 칸영화제가 개막했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로, 매년 5월을 장식했던 칸 영화제는 작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열리지 못했고, 올해 7월이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그 포문을 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축제이기는 해도 어딘가 '그들만의 축제'라는 느낌이 있었던 칸영화제가 올해는 달랐다. 무려 오프닝에 익숙한 얼굴 봉준호가 등장한 것. 그의 입에서 나온 '선언합니다'라는 한국말에 피가 당겼다. 그런데 봉준호 옆에 있는 핑크남이 너무나도 시선을 잡아 끈다. 아니 저 아재 너무 힙하잖아?
봉준호 옆 이 힙한 아저씨는 미국 흑인영화를 대표하는 스파이크 리 감독이다. 본래 자유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그는 이번 칸영화제에서도 한 건 했다. 블랙 일색인 레드카펫에서 핑크 프레임 선글라스와 핑크 수트라니! 여기에 커스텀한 나이키 에어조던까지. 조각 같은 20대 배우들도 그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본래 칸영화제는 아주 콧대높은 행사이다. 레드카펫 드레스코드 역시 마찬가지인데, 남자는 보타이에 수트와 구두, 여성은 드레스에 하이힐이 바로 이들이 규정하는 품격있는 레드카펫의 정석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든 고리타분한 규칙을 가볍게 밟아주는 반항아들이 있다. 오늘은 깐깐하기로 유명한 칸영화제 레드카펫과 당당하게 맞짱을 뜬 역사적 인물들을 살펴보려 한다.
피카소가 피카소했다. 1953년 칸영화제에 초대받은 파블로 피카소는 턱시도 수트 위에 양털무스탕을 입고 행사장을 찾았다. 한결같이 블랙 턱시도 차림의 남성 뿐이었던 그 곳에서 양털 무스탕의 존재는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드레스코드를 무시했다고 한들 그 누가 이 역사적 화가 어르신에게 핀잔을 줄까. 이 사진을 보니 90년대 잘나가는 래퍼들이 수트 위에 큼직한 퍼코트를 입은 모습이 생각난다.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피카소, 몇 수를 내다 본 거야?
당시 마돈나를 모르면 외계인이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슈퍼스타 그 자체였다. 그런 마돈나가 1991년 칸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한 편의 영화같은 상황이 레드카펫에 펼쳐졌다. 마치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를 연상시키는 핑크 새틴 가운을 걸치고 등장한 마돈나.
계단의 정상까지 오르자 그녀는 핑크 가운을 스르르 벗더니 자신의 시그니처 스타일이자 장 폴 고티에가 디자인한 콘 브라를 드러냈다. 여기에 중요부위만 실크 소재로 덧댄 드로즈까지, 기자들은 일제히 그녀를 향해 플래시를 터트려댔다.
마돈나의 깜찍한 퍼포먼스로 모두가 그녀에게 주목하고 열광했던 저 상황, 정말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속 장면과 닮았다. 마돈나는 이 이색 퍼포먼스로 마릴린 먼로를 오마주 한 걸까?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팬이라면 그녀의 얼굴이 익숙할 것이다. <욕망의 낮과 밤>부터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과 다양한 작품을 함께한 스페인 배우 빅토리아 아브릴은 1997년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말 그대로 찢었다. 그녀는 단정해보이는 앞모습과(바지는 안 입었지만) 상반되는 뒷모습으로 칸 레드카펫에 확실한 엿을 먹였다. 이 스타일링은 마치 "앞에서는 니네들 비위 맞춰줄게, 뒤는 내 맘이야"라고 말하는듯하다.
칸영화제 레드카펫에서 하이힐이라는 드레스코드는 꽤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누군가는 예뻐 보이기 위해 더 높은 하이힐을 신고싶어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불편해서, 몸에 무리가 가서 거부하기도 한다. 2014년 우마 서먼 역시 하이힐 대신 편안해 보이는 플랫샌들을 신고 환상적인 레드카펫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하이힐을 신지 않아도 그녀의 모습은 여신 그 자체였다.
플랫슈즈는 커녕 아예 맨발을 택한 스타들도 있다. 그녀들이 고귀한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맨 살로 느끼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다.
2016년 줄리아 로버츠는 어깨라인이 돋보이는 블랙 드레스에 맨발로 칸 레드카펫을 밟았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하이힐을 신을 수 없는 중년 여성 영화인들을 대변한 퍼포먼스였다고 한다. 세상에 줄리아 로버츠는 시위도 우아하고 아름답게 해내는구나.
2년 뒤인 2018년 칸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역사상 가장 섹시한 레드카펫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그녀가 샤넬의 메탈릭 미니드레스에 크리스찬 루부텡의 스틸레토힐을 신고 레드카펫에 서자 기자들은 일제히 '고져스!', '스터닝!'을 외치며 플래시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행동에서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몇배는 커졌다. 갑자기 루부탱을 벗어 들더니 시크하게 레드카펫에서 퇴장한 것.
어째 퇴장하는 모습이 더 멋진 크리스틴 스튜어트. 크리스틴은 한 인터뷰에서 "남자한테 요구하지 못하는 거라면, 나한테도 요구할 수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로 이 해프닝은 간단하게 정리가 되는 듯 하다.
2018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케이트 블란쳇은 주요 영화 시사회 레드카펫마다 다양하고 멋진 드레스를 선보였다. 그 중에 왠지 낯익은 드레스가 있었다. 정교한 레이스 디테일에 슬림한 실루엣이 돋보였던 이 아르마니 프리베 드레스는 그녀가 4년 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블루재스민>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입은 것이었다. 재탕이면 뭐 어떤가 이렇게 멋진 드레스를 한번만 입는 건 너무 아쉽긴 할 것 같다.
2019년 칸영화제를 찾은 키디 스마일은 '남성은 보타이에 턱시도'라는 칸의 드레스코드를 깨고 본인 취향의 화려한 의상을 선택했다. 밑단이 드라마틱하게 퍼지는 플라워 프린트 드레스와 디스코 무드의 점프수트로 성별의 경계를 가뿐히 뛰어넘은 것. 그가 만약 보타이에 블랙 턱시도를 입었더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