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자현 Dec 13. 2018

공연에 대본이 꼭 필요한가요, 뭐?

없으면 같이 만들면 되지, 안 그래요?

관객참여형 공연을 들어보았는가? 나의 첫 관객참여형 공연에 대한 기억은 홍대에서 공연했던 연극 〈당신이 주인공〉에서 시작된다. 사실 연극이라기보다는 관객참여 '콩트쇼'에 가까웠는데 출연진들도 거의 개그맨이거나 개그맨 준비생인 데다, 일정한 스토리를 가지고 극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참여를 중심으로 한 옴니버스 형태로 극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사람들을 한 명씩 무대로 불러 갑작스레 연기를 시키거나, 여러 관객들에게 아침드라마 대본(주로 시어머니, 며느리, 갑자기 뛰어들어오는 내연녀 등)을 나누어 준 후 차례로 읽게 해 웃음을 유도하는 등 공연이 진행되었다.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공연이 진행되었기에 재미도 있었고, 많이 웃었지만 '너무 단순하다'라고 생각하며 공연장을 나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관객참여형 공연은 진화했다. 연극과 뮤지컬 등 공연문화가 대중의 품에 안기면서, 점점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실험의 중심에는 관객참여형 공연도 있었다!




넌 아이디어만 내, 공연은 우리가 만든다!


내가 보았던 관객참여형 공연 중 가장 신박했던 것은, 뮤지컬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이었다. 덕들 사이에서 '오첨뮤'라 불리는 이 극은 관객들이 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즉흥극'이다. 스토리? 없다. 플롯? 없다. 주인공도, 조연도, 노래도, 안무도 없는 이 극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오직 '관객들의 아이디어'와 '선택'이다.


장르, 주인공의 이름, 장소, 제목 등 모든 극의 요소들을 '관객'들이 정한다. 2018년 8월 15일에 내가 본 회차의 장르는 아침드라마, 제목은〈서른이지만 본부장입니다〉였다.


극 중 극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연출의 독단에 의해 공연을 잡게 된다. 그것도 뮤지컬을! 그리고 나면 갑자기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구걸(?)을 하기 시작한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장르, 주인공의 이름, 주인공의 정체, 나이, 꿈, 장단점, 특징 등을 말이다. 이번 시즌에는 특별히 대학로 소상공인들을 대상으로 PPL까지 진행했다. 그리고는 그 내용으로 공연을 시작한다. 진짜, 미친 것 같다.


우리 회차의 제목은 〈서른이지만 본부장입니다〉였다. 아침드라마에나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맞다. 장르는 아침드라마였다. 주인공의 이름은 '본 부장'이었다(참고로 나중에 아버지가 나오는데 아버지의 이름은 '본 도시락'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찾는' 꿈을 꾸고 있고, 인류애가 충만하지만 술을 마시면 변하는 여자다. 그런 그녀에게 엄청난 특징이 있으니, 바로 '발박수를 치면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관객들이 설정했다.


그 발박수 맞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시간을 멈춘다니까요?


사실 그 날은 8월 15일, 광복절이었기 때문에 이전 시즌에 공연을 한번 봤던 나는 그날 공연을 '민족중흥역사극'으로 만들고 싶어서 장르 제안을 했는데, 리젝 당했다(재미가 없을 것 같았나 보다). 그래서 주인공 이름으로 '안 중근'을 제안했는데, 그런 민감한 이름은 지양한다고 정중히 거절당했다. 극이 워낙 즉흥으로 진행되다 보니 지난 시즌에 배우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회적 물의를 빚을 수 있는 요소들이 등장한 적이 있어서 보다 조심스러워진 것 같다. 


참고로 지난 시즌에는 관객 중 누군가 주인공으로 발탁된 홍우진 배우를 '고래'로 설정해서 극이 용궁 시리즈가 됐었다. 덕분에 민머리였던 이정수 배우는 문어 역을 맡았다. 그때 필자는 주인공의 단점으로 '고래인데 술고래다'를 제안해서 채택되어 뿌듯했었는데, 이번에는 제안 실패(상처).

그렇게 공연을 마치고 나면 이런 정리본이 나오게 된다. 극의 제목을 지은 관객에게는 이미지가 인쇄된 티셔츠를 선물로 주는데, 몹시 탐이 났다.


사실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은 아주 기본적인 배우들 간의 약속과 최소한의 틀을 기반으로 진행된다. 관객들은 눈치채기 어렵지만, 극 중간중간에 삽입하기로 한 넘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멜로디, 가사는 즉흥)와 흐름이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중간에 '쇼 스토퍼(Show Stopper, 극의 전환을 위한 솔로 넘버)'의 씬도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이 보여주는 창의성과 즉흥성은 정말 대단하다. 상황을 끌고 가는 순발력과 중간중간 관객들이 설정해 준 요소들을 써먹는 능력은 극을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함과 동시에 한시도 웃음을 멈출 수 없게 한다. 


공연을 몇 번 해본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런 극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연 도중에 포기를 해도 정말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기존에 정해진 방식으로 연기를 하고 감정을 쓰는 것도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인데, 연기와 노래를 하면서 다음 스토리를 생각하고 다음 대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 같다. 그러니 초연 때 배우가 김태형 연출에게 거액의 빚을 졌다던가, 배우가 심신 미약 상태일 때를 노려 무의식이 대신 사인을 했다던가 하는 괴담이 전해지는 것일 테다.




하지만 관객들은 몹시 즐겁다. 미숙한 부분들과 실수가 끊임없이 나오는 극임에도 관객들은 그것 역시 즉흥극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즐기게 된다. 특히 우리가 설정한 스토리로 극이 진행된다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씨어터 RPG(Role Playing Game)인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는 엄청난 흥행을 했다.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내가 본 회차에는 PPL로 대학로의 한주(韓酒) 전문점인 '두두'와 그 사장님이 특별 출연했는데, 내 관점에서는 연극/뮤지컬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머무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상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참 좋았다. 사장님은 몹시도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셨다(실은 배우이신 게 아닐까?).


관객참여형 공연의 종류는 다양하다. '오첨뮤'와 같이 관은 실제로 거의 개입하지 않으면서 극을 만들어가는 형태도 있고, 처음 이야기한 〈당신이 주인공〉처럼 직접 관객이 개입하는 극들도 있다. 또 단순히 극 중 스토리와는 관계없이 간단한 참여를 유도하는 극도 있고, 최근 파란을 일으켰던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와 같은 실험극들도 있다.


이 공연들을 즐기기에 필요한 것은 단 하나다. 오픈 마인드! 어차피 모두가 즐기기위해 온 이상, 제정신은 잠시 내려놓고 미쳐보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이롭다. 


어차피 공연은 배우님들이 해 주실테니, 우리는 마음껏 우리만의 공연을 만들고 즐겨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공연 중 무대가 부서진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