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그들을 잊을 수 없다, 무대참사!
우리는 무대가 완벽할 것이라고 믿는다. 최선을 다해 연습한 배우들이 완벽하게 준비된 무대와 조명, 음향 속에서 공연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연 역시 사람의 일이기에 공연 중 실수를 하기도 하고, 의도된 이벤트나 촌극을 진행하기도 하며, 가끔 특별한 날에는 기존의 공연과 다른 형태의 공연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은 공연을 기억하는 나의 서랍에서 특별한 칸에 위치하게 된다. 보통 막공이나 특별한 날에 이루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정상적인 연출이지만, 실수나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돌발적인 상황에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관람하는 것도 순간의 예술인 공연만의 특징이다.
2017년 10월 22일, 전날 과음 탓에 예매해 놓은 공연을 볼까, 말까 고민하다 '그래도 보고만 오자' 생각하며 청바지에 회색 후드티를 한 장 걸쳐 입고 대학로로 향했다. 공연에 들어가기 전, 박카스와 숙취해소제를 같이 입에 털어 넣고 두 시간만 멘탈이 버텨주기를 기도했다. 그 날,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모른 채.
1920년대 극작가 김우진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의 2916년 8월 4일 현해탄 투신사건 실화를 각색하여 창작한 뮤지컬 〈사의 찬미〉에는 팬들이 부르는 몇 가지 별명들이 있었으니, 바로 '사의 참사', 혹은 '(참)사의 찬미' 등이었다. 극 중, 의도치 않은 참사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는데 〈사의 찬미〉라는 극이 가진 음울한 이미지와 광기 어린 연기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사건들이었다.
캐스팅은 정동화 우진, 김종구 사내, 최연우 심덕이었다. 개인적으로 〈사의 찬미〉는 난해한 합창과 단조 중심의 멜로디, 특유의 음울하면서도 섹시한 분위기가 자아내는 무대가 아주 멋진 극이었다. 하지만 참사는 극의 막바지에 등장했다. 앞 장의 다툼 씬으로 인해 어질러진 무대를 정동화 배우가 들어와 정리하는 씬이 있었는데, 앞 씬에서 바닥에 떨어진 액자를 정리하던 정동화 배우가 액자를 두 동강 낸 것이다. 당황한 정동화 배우는 서랍을 열어 액자를 그 안에 넣음으로써 상황을 무마하려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랍을 열다가 아예 뽑아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2열에 앉아있던 나는 보았다. 흔들리는 그의 동공을. 그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관객들을 뒤로하고 다행히 타이밍에 맞게 정리가 끝났고 극은 전개되었지만, 굉장히 흥미진진한 실수였다. 아직 깨지 않은 숙취가 한 번에 날아갈 정도로.
사실 이외에도 정동화 배우는 당시 공연에서 '파괴왕'으로 유명했는데, 배의 갑판에서 발을 구르는 애드리브를 하는 도중 발판이 부서지고, 약병을 집어던졌는데 약병이 반으로 쪼개졌으며, 던진 약통이 바닥과의 작용-반작용 법칙에 의해 객석 1층 1열 관객의 무릎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또 사내를 쫓아가던 우진이 사내를 놓치고 분노에 가득 차 벽을 치는 디테일이 있는데, 벽을 치자 '쾅!' 소리와 함께 벽 무대가 주먹 모양으로 부서졌다. 당시 제작사인 네오프로덕션은 정동화 배우의 이런 에피소드들이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해당 회차의 공연 영상을 유튜브에 풀어버렸다. 그것도 '뮤지컬 사의찬미 무대참사 현장'이라는 자극적인 주제를 달아서. 이 영상은 일반 공연 실황 영상으로는 이례적으로 1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얻기도 했다. 일종의 '참사 마케팅'이랄까?
사실 정동화 배우는 성실하고 친절하기로 소문이 난 배우다. 몇 번 퇴근길을 기다리며 인사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거의 유일하게 서있는 남덕인 나를 알아봐 주고 반겨줄 만큼 팬들을 챙기는 마음이 살뜰하다. 그런 배우가 만들어 낸 에피소드이기에 이런 일들이 더욱 회자되고 팬들 사이에서 즐거운 미담으로 남는지도 모르겠다. 본래 실수는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해야 더 빛을 발하는 법이다.
공연을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의 서랍 속에 그때의 느낌과 감정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과정이다. 더 소중한 물건들은 서랍의 가장 위칸에 조심스레 자리하고, 언제든 찾아볼 수 있도록 잘 갈무리하는 것과 같이 나만의 에피소드들은 마음속에서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좋은 공연의 경험이 된다.
특히, 앞서 '누구나 마음속에 무대 하나씩은 품고 산다.'에서 이야기했던 완벽한 공연과 같이 내 마음에 품고 있는 나만의 '레전'도 그렇지만, 위에서 말한 소소한 에피소드와 사건, 사고, 참사들도 기억 속에 깊이 남는다. 이 기억들은 삶을 살아가며 조금은 우울할 때, 하루가 지루할 때 잠시 기억의 서랍에서 꺼내어 생각하고 떠들며 삶을 환기하는 바람 같은 기억이 된다.
올해 연말에는 특별한 순간을 기대하며 공연장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찬 겨울에 어울리는 따뜻하고 포근한 공연들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또, 운이 좋다면 또 다른 참사의 현장을 보거나, 색다른 이벤트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