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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현 Nov 23. 2018

누구나 마음속에 무대 하나씩은 품고 산다.

그 날은 정말 특이했었죠. 아니, 특별했었어요!

한 공연이 끝나면 연극뮤지컬 게시판에는 이른바 '불판'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 날의 공연을 리뷰하고 각자의 느낌과 감상을 공유하는 자리다. 단연 독보적인 두 가지 주제는 '오늘 공연이 좋았는가?'와 '오늘 공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다. 앞에서도 계속 언급했듯 공연은 순간의 예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완벽한 공연은 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 그 모든 것이 완벽한(혹은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공연은 존재하고, 덕들은 그 공연을 '레전(Legend)'이라 부른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레전(Legend)이 있다. 


야, 오늘 공연 레전(Legend)이었다!


사실 레전 공연은 사람에 따라 다소 다르다. 결국 공연은 관객 개개인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완벽하다고 생각한 공연이 누군가에게는 완벽하지 않을 수 있고, 반대로 '오늘 공연은 별로였어'라고 느낀 공연이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공연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이른바' 레전 공연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방향으로 규정되지만, 그 안에서 나만의 레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2013년 겨울 어느 날의 〈베르테르〉는 나에게는 영원한 '레전' 공연으로 남을 것이다. (출처: 정컬쳐)


내게 최고의 공연을 하나 꼽으라면, 썸(Something)이 연애로 발전하듯 뮤지컬의 매력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던 2013년 겨울의 〈베르테르〉를 꼽겠다. 몸도, 마음도, 지갑도 추웠던 대학생 휴학기, 학비를 모으기 위해 은행에서 청원경찰로 일하면서 받은 자그마한 월급을 쪼개고 쪼개 몇 개의 공연에 투자하던 시절이었다. 그마저도 충청북도에 자리한 한 시골의 은행 지점이었으니, 공연을 보려면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오가야 했던 그런 나날들이었다. 12월의 한파를 뚫고 도착한 예술의 전당, 벽에 붙은 표지판을 보고 따라 들어간 CJ토월극장. 캐스팅은 엄기준 베르테르, 전미도 롯데, 양준모 알베르트였고, 내 자리는 2층 C구역의 한 귀퉁이였다.


그리 크지 않은 무대에 화원 세트가 밀려들어오고, 베르테르는 롯데에 대한 사랑을 갈망했으며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전에 읽었던 원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내용인데도, 그 날의 베르테르를 잊을 수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원망을 토해내던 엄기준 배우의 연기에서 감정의 밑바닥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관계로만 보면 베르테르는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남자일지도 모른다. 롯데는 처음부터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는 여자였고, 결국 알베르트에게로 돌아갔다. 아니, 베르테르에게 온 적이 없었으니 돌아갔다는 표현조차도 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베르테르의 감정과 사랑만을 보여주는 이 극은, 어쩌면 베르테르라는 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변론처럼 느껴졌다.


극 중 20대 중반인 베르테르와 배우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젊은'을 떼고 그냥 뮤지컬〈베르테르〉가 되었다는 속설이 있다. (출처: CJ Creative Journal)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기준 배우가 보여준 처절한 사랑의 마음은 그의 찌질한 행동과 극단성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베르테르가 오르카를 찾아가 자신의 슬픈 마음을 토로하는 '돌부리 씬'과 넘버 '발길을 뗄 수 없으면'에서는 객석 2층에서도 그의 감정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져서 가슴 한 귀퉁이가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답답함이 만들어낸 베르테르의 극단적 선택은 무대 위에서는 해바라기가 쓰러지는 연출로 상징되었고, 노란 조명에 노란 옷을 입은 베르테르를 중간에 둔 채 수십 개의 노오란 해바라기가 쓰러지듯 무너지는 장면에서 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 날의 공연은 누군가에게는 '레전'이 아닐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레전'이었다. 나는 그 날의 날씨와 옷차림, 무대의 분위기, 객석의 공기와 조명의 온도를 기억한다.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고, 그 이후로 나는 한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공연은 새로운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나를 바꾸기도 한다.




공연을 보다 보면 극장을 나올 때마다 다양한 생각이 든다. 어떤 날은 '아 오늘은 공연도, 공연장도, 배우들도 다 별로인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어떤 드라마에서 말했듯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오늘 본 공연이 무작정 좋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공연을 보기 전의 날씨나 상황, 그리고 몸 상태가 공연을 보는 기분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편이라 기대했던 공연을 보러 갈 때는 나름의 준비를 철저히 하고 가기도 한다. 좋아하는 안경을 쓴다거나, 새로 빨아 빳빳하게 다린 옷을 입는다거나, 저녁을 먹는다면 너무 배가 부르지 않게 한다거나, 하는 시시콜콜한 것들이지만 나에게는 나름 신성한 예식이다.


퇴근하고 피곤한 몸으로 공연을 보러 갈 때면 꼭 박카스를 하나씩 먹고 들어간다. 집중을 위해서다. 광고 아님. (출처: 동아제약)


그러다가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최고의 공연을 만날 때면 정말 기쁘다. 기대했던 공연이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공연이 예상 외로 좋았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갔는데 역시 좋았을 때나, 처음 보는 사람이 내게 좋은 인상을 주었을 때와 비슷하다. 좋은 공연 하나를 보면 그 날 하루를 넘어 한 주, 한 달 동안 행복하게 지내기도 한다.


그렇게 나의 '레전' 공연들을 차곡차곡 쌓다 보면 점점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좋은 공연은 마음속에 감성과 감동이 들어갈 공간을 만드는 것 같다. 공연을 본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수집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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